'박찬욱 최고의 걸작이 탄생했다.' 'SF액션의 볼거리는 많지만 이야기가 문제다.' 영화 '박쥐'와 '터미네이터4-미래전쟁의 시작'이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됐을 때 각각 나온 평단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개봉 후 성적은 그와는 달랐다.
'박쥐'는 개봉 후 상당 기간 전국 400여개 스크린에서 상영됐지만 한 달 동안 200만 관객에 그쳤다. 반면 '터미네이터4'는 개봉 첫 주말 전국적으로 170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모았다. 평론가들과 관객이 특정 영화에 대해 지지 혹은 반대하는 입장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박쥐'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이 소식은 '영화가 어려운 것 아니냐'는 인식만 넓히는 역효과를 낳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이 웬만해서는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기 어려운 건 그 때문이다. 하물며 칸 영화제는 몇 안 되는 예술지상주의형(型) 영화제다.
중견 감독 중에는 자기 시사회에조차 얼굴 내미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개 극장 구석에서 전문가들의 반응을 살핀다. 그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된 평론가가 엄지손가락 두개를 위로 쳐들면(two thumbs up: 영화가 매우 훌륭하다는 의미) 오히려 얼굴이 흙빛이 된다.
평론가의 반응이 좋으니 영화 흥행은 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상업영화를 찍었는데 예술영화로 인식되거나 취급받으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소수(평론가·영화전문기자·문화평론가)보다는 다수(대중 관객)를 위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렇다고 감독과 제작자, 투자 배급자들이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큰 '싸움'으로 번지기 쉽다. 1995년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로 불거진 평단과 영화계 논쟁은 한명의 영화평론가로 하여금 절필을 선언하게까지 했다. 날 선 비판으로 유명했던 이정하씨는 이후 지금까지 평론 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있다.
평론가와 일반 대중들 사이에도 간극은 점점 커지고 있다. 2007년 '디워'가 개봉된 후 진중권씨 등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쓰레기' 운운의 얘기가 나왔고 그에 대해 대중들은 천만명 이상이나 이 영화를 관람해 줌으로써 자신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영화평론이 대중들의 시선과 종종 엇갈리는 데는 평론이라는 글쓰기(혹은 짧은 방송 멘트)가 갖는 속성과 관계가 있다. 글을 쓴다는, 인문학적 행위는 아무래도 영화를 단순한 '보기'의 차원을 넘어 해석하고 분석하는, 그리하여 영화를 하나의 텍스트(text)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장르의 컨벤션'(상업영화에서 나타나는 관습적 표현이라는 의미)이니 '수사(修辭)로서의 미니멀리즘'이니 혹은 '시퀀스의 충돌'이니 또는 '사전적 영상의 존재론'이니 하는 알쏭달쏭한 얘기들이 난무하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 보는 행위를 휴식과 오락,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약간의 처방 혹은 도움으로 간주하는 대중들은 그런 얘기에 짜증을 내기 십상이다.
평론가들이 영화를 보는 데는 여러 요소가 동시에,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철학 혹은 사회학, 심리학 등 학문적 기초가 결합되고 추구하는 세계관과 계급의식, 심지어 나이와 성별, 본능과 직관, 생활습관과 취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씨줄 날줄로 얽힌다. 평론가들의 글 혹은 언변이 일종의 엘리트주의처럼 받아들여지거나 오히려 더 속물적(snobbish)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화와 관련된 글이 어려운 게 맞다고 생각한다. 뉴욕타임스의 A.O 스콧이나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의 글, 우리의 정성일씨의 글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영화 글은 대중적이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뉴스위크의 데이비드 앤슨이나 시카고 선 타임의 로저 에버트, 우리나라에서는 강한섭씨의 글이다.
같은 평론가면서도 어떤 이는 '박쥐'를 천재적 작품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단순히 이미지를 위한 작가의 영상실험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스타트랙'을 화려한 특수효과가 넘쳐나는 단순한 SF 블록버스터로 보는 평론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백악관의 정치학'을 유추해 내는 사람도 있다.
서로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평론가들이 글을 쓰는 기초는 뭐니뭐니 해도 영화보기의 욕망에 있다. '스스로 얼마나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느냐'야말로 평론의 핵심이다. 그 욕망의 진정성이 느껴질 때 대중들은 영화를 넘어 영화 평론에 동조하고 열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