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朝日)신문이 "쇼와(昭和·1926~89)시대를 생각하면 누가 떠오르는가?"란 질문을 일본인 3000명에게 던졌다. 지난 2~3월의 설문조사였다. 733명이 "쇼와 덴노(天皇)"라고 답했다. 쇼와 일왕 재임기에 대한 질문이니 충분히 예상된 응답이었다. 2등이 의외였다. 494명이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꼽았다. '쇼와의 상징'으로 유명한 가수 미소라 히바리(143명)를 3등으로 밀어냈다.
지난 2000년, 이 신문은 밀레니엄 특집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거 1000년 동안의 정치 리더는?"이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등은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 2·3등은 난세를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가 차례로 꼽혔다. 이미 신격화된 이들 역사적 영웅의 바로 뒤를 이어 당시 4등에 오른 인물도 다나카 전 총리였다.
이때 아사히신문은 다나카를 이렇게 간단히 소개했다. '지방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총리. 일본열도개조론을 주장하고, 록히드사건으로 체포. 전후 고도성장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하지만 '다나카=고도성장' 이미지는 허상에 가깝다. 다나카가 총리에 오른 1972년은 일본 경제가 저(低)성장에 진입한 때였다. 그가 물러난 1974년은 석유위기까지 겹쳤다. 그럼에도 국민이 그렇게 믿는 것은 그가 '일본열도개조(국토균형발전)'란 슬로건을 내걸고 성장의 결실을 본격적으로 분배했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빈농 출신이다. 고등소학교 졸업, 요즘 학제로 '중졸(中卒)'이 학력의 전부다. 시장에서 사업 기반을 다지고 정계로 진출할 때까지 그의 일천한 배경은 핸디캡이었다. 하지만 탁월한 수완으로 자민당 본류에 진입한 뒤부터 핸디캡은 정치적 자산으로 변했다. 고도성장에서 소외된 국민이 말만 앞세우는 사회당 대신 '서민권력자' 다나카에게서 빛을 찾으려 한 것이다.
지금 다나카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바라마키(인기 영합의 분배주의) 정치로 나라 살림을 골병들게 한 원조(元祖)"란 비판론이 우세한 듯하다. 하지만 "다나카의 분배정책이 보수의 저변과 자민당 영구집권 기반을 강화했다"는 긍정론도 있다. 지방과 서민을 자민당 보수 정치의 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다나카는 내놓고 부패한 정치가였다. "정치는 수(數), 수는 힘, 힘은 돈"이란 어록도 있다. 그래서 그는 총리 이전부터 이후까지 줄곧 '죽이기'에 시달렸다. 언론이, 검찰이 앞장섰다. 문예춘추가 다나카의 금맥(金脈)을 파고든 것은 당돌하게 총리 재임기였다. 검찰이 록히드 수뢰사건으로 다나카를 구속한 것은 총리에서 물러난 2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정치가 다나카는 죽지 않았다. 체포 후 2심 유죄 판결까지 11년 동안 모두 다섯 번의 총선거에서, 다나카는 한 번도 전국 최고 지지율 기록을 놓치지 않고 당선됐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구속 이후에도, 유죄 판결 이후에도, 심지어 죽은 지금까지 그를 지지한다. 결국 그를 죽인 것은 국민도, 언론도, 검찰도 아니었다. 다나카를 통해 이익을 챙기던 측근들의 비정한 배신과,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난 병마(病魔)였다.
30일 일본 TV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 장면을 주요 뉴스로 방송했다. 지지자들이 뿌려대던 노란 장미, 흔들어대던 노란 풍선이 눈을 압도했다. 이게 무슨 용의자 소환 풍경인가. 창피했지만, 보이는 그대로가 현실이었다. 그들의 외침대로 '노무현'은 죽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포퓰리즘의 상처는 언론의 폭로나 검찰 수사로 쉽게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가 파놓은 '계급의 골'을 메울 때까지, '노란 풍선'은 망령처럼 한국 사회를 부유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