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쥐’를 본 후, ‘올드보이’가 개봉 중이던 몇 년 전 모 온라인 언론 매체와 가졌던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기사 한 대목이 계속 떠올랐다. 이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내 영화들에 난폭한 면이 있는 건 내가 마음이 약하고 얌전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감독도 일종의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지식인이 갖는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 “가급적 작품을 통해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기대치를 항상 따를 수는 없다”는 내용으로 박찬욱 감독은 답변했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을 논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로 ‘복수’나 ‘구원’, ‘원죄’ 따위의 매우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인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박찬욱 감독이 철학과 출신이라 그런지도 모르겠고, 실제로 영화를 해석하다 보니 그러한 용어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콘텐츠’를 실제로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기자나 평론가들에게 난데없이 철학에 대한 빈곤한 지식을 탓하게 만드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은 하지만, 애매모호한 미장센으로 떡 칠 된 작가주의적 영상은 또 아니다.

오히려 박찬욱 감독의 영상은 꽤 자극적인 편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그 어떤 ‘심오한 콘텐츠’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영상에 깃든 선정성이나 폭력성, 또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나 시니컬한 유머감각 등에 대해 대체로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그의 영상에서 느낄 수 있는 일관된 인상을 ‘박찬욱식 스타일’이라 부른다면 그 스타일은 곧 ‘모범생’ 박찬욱의 숨겨진 욕망과 다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간 장르, 이야기, 가치와 의미, 그리고 스타일 등 ‘웰메이드’된 영화를 구성하는 굵직한 요소들을 서로 잘 어우러지게 버무려서 ‘박찬욱식 스타일’을 영화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끔 ‘모범생’답게 조절을 해왔다면 영화 ‘박쥐’에선 이 스타일이 봇물 터지듯 사방에서 콸콸 넘쳐 흐른다.

상현(송강호) : "사제가 이러면(간음하면) 죄가 더 커요"
태주(김옥빈): "난 신앙이 없어서 지옥 안 가요"

박찬욱 감독 내면의 ‘모범생’과 ‘흡혈귀’는 계속 갈등을 벌여왔고, 그게 영화 ‘박쥐’에서 가장 격렬하게 부딪힌다. 그러다 결국 ‘모범생 상현’은 흡혈귀의 피로 모처럼 드러난 욕망을 ‘태주’에게 집중시켜 발현하고 만끽한다. 이 ‘상현’의 욕망이 ‘태주’의 욕망과 더해져 그 꽃을 피울 동안 ‘박찬욱식 스타일’이 영화 속에서 눈부시게 발휘된다.

따라서 영화 ‘박쥐’에서 믿음과 타락 사이에서 번민하는 도덕적 딜레마 따위의 거창한 메시지를 구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뜨악’한 작품이 될 수 있다. ‘박쥐’는 확실히 ‘의미’보다는 ‘스타일’, 그러니까 박찬욱 자신의 욕망을 ‘심오한 콘텐츠’에 우선해서 눈치 안보고 마음껏 펼쳐낸 영화라 그렇다. 그래서 분위기는 산만하고 서사도 상대적으로 헐거워 보인다.

하지만 “걸작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든 영화 중에서는 제일 낫다”라고 이야기한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적어도 영화 ‘박쥐’는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만족스러운 필모그래피가 될 것이다. 게다가 그의 욕망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대변해준 배우들, 특히 송강호와 김옥빈의 연기는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 가운데서도 가장 빛이 난다.

4월 3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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