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선임기자

봉하마을을 다녀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됐을 때 취재차 가본 뒤로, 6년 만이다. 좁고 파인 길, 밭과 야산, 낡은 시멘트담, 슬레이트 지붕…그런 풍경은 이제 없었다.

마치 신도시로 들어가는 것처럼 왕복 2차선 도로가 뚫려있었다. 길을 물을 일도 없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은 성공한 대통령입니다' 현수막을 따라가니, '대통령 마을' 관광지에 도착했다. 대형 관광버스들이 서있는 주차장, 관광안내소, 종합복지관, '봉하빵' 기념품가게들이 다 초면(初面)이었다.

골목 입구에 쳐놓은 폴리스라인에서, 연고동색 목재와 유리로 된 멋진 대통령 사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빌린' 15억원도 이 집을 짓는 데 썼다고 한다. 서울과 지방의 땅값 차이는 있지만, 역대 대통령의 사저 중 가장 넓다. 재임 시절 그가 청와대를 방문한 노사모 핵심 멤버들에게 "집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자"고 약속했을 만하다.

당초 봉하마을에 들른 것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몰락(沒落)에 대해 쓸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제 독자들은 그 이름만 나와도 질린다. 글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이 꽃피는 봄날에는 좋은 생각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는가.

그래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서 깊숙이 들어간 '천진암'으로 갔다. 이곳에는 우리 나이로 일흔살인 변기영 신부가 산다. 그는 혼자의 고집으로 시작해 여기서 34년째 '천진암 대성당'을 짓고 있는 중이다.

"한때 늘씬했던 젊은 신부가 어느덧 방바닥에 늘어놓은 메줏덩이 같은 몸이 됐다"는 그의 말대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여기서 반평생을 쏟았던 셈이다. 그런데 막상 광활한 빈터에는 사방 출입문 자리를 표시한 철골과 정방형의 화강암석들만 놓여있을 뿐이다. 몇 년 전에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이다.

"진척 공정이 부지하세월이군요."

참지 못해 촌평하자, 노신부의 답변은 무심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니까 그렇지요."

그에 따르면, 보란 듯이 건물만 후딱 올리면 끝이 아니다. 야산자락을 깎아 마련한 성당 터를 몇 년간 일부러 그대로 묵혔다. 뜨거운 햇볕과 추운 눈보라에 노출돼야 지반이 단단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차 사람들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계곡에 흐르는 물을 가둬 용수(用水)를 확보했고, 주변에 어울리는 무궁화도 16만 주를 심었다고 설명했다.

"순리대로 잘 되고 있고 너무 서둘러 짓는 게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 체코 프라하 대성당은 935년에 터를 닦아 1929년 낙성식을 했으니 1000년간 지은 것이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대성당은 1882년부터 아직까지 짓고 있고…"

그가 세워놓은 건축기간은 '100년'이다. 관공서에서는 "건축기간이 100년 걸리는 것은 건축법상 불법"이라며 처음에는 허가를 안 내주려고 했다. 인근 별장에 머물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재벌 회장은 "신부님이 100년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며 그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했다.

사실 요즘 세상에서 밀어붙이면 그런 긴 세월이 걸릴 리 만무하다. 재원이 마련되면 현대적 공법과 중장비를 총동원해 3년 안에도 건물을 올릴 수 있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안다.

하지만 그는 건축 경비를 위해 특별헌금을 내라고 들볶지도 않고, 기념품을 팔거나 수익사업을 벌이지도 않는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결핍이 있어야 기도하는 가운데 겸손해진다"는 말만 한다. 이곳을 둘러본 신자들이 마음에 감동이 있어 보내오는 헌금만 받는 식이다. 아직 박연차 같은 인물을 못 만나서 그런지, 재벌로부터 지원받은 적도 없다.

"대성당 낙성식 때 감사패라도 받을 수 있어야 돈을 내고 싶을 텐데, 100년이나 걸리니 생전에 언제 감사패를 받겠소. 무엇보다 나중에 이 역사적인 성당이 어느 돈 많은 재벌의 기부로 지어졌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세워진 건축물보다 그걸 짓는 과정, 100년 동안 짓겠다는 정신이 더 소중하지요."

그는 대성당이 자신의 생전에 완공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자기가 결실을 다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내가 이만큼 해놓으면 다음에 누가 이어 짓겠지요."

이 노신부가 인격적으로 완벽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처럼 먼 길을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는 실로 귀하다. 대부분 말로만 요란하게 꾸며 떠드는 데 능할 뿐이다. 또한 그처럼 '여유 있는' 집념을 가진 이는 찾기 어렵고, '각박한' 집념의 인물만 넘쳐난다. 내일 그런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