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들어봤어도 이 대첩비의 주인공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제가 조선침략전쟁인 임진왜란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숨기고 싶었을까, 몰래 반출해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했던 북관대첩비. 1978년 박정희 정부의 반환요구 이후 2003년 외교통상부 주도로 본격 반환협상이 시작, 드디어 2005년 환수되었다. 이후 2006년 2월 28일 의정부시 장군 묘소에서 충의공 제향의식이 끝난 뒤, 2006년 3월에야 원래 자리인 함경도로 돌아간 북관대첩비의 처지는 참 기구하다.
북관대첩은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 북평사(北評事)라는 낮은 관직에 있던 문관 정문부(1565~1624)가 중심이 되어 1592년 9월 거병한 북관의병이 6개월의 치열한 전투 끝에 왜군과 내통한 반란군과 정예병 2만2000명을 이끌고 함흥으로 진격하던 가토 키요마사의 부대를 함경도에서 몰아낸 전투이다. 왜란 때 한산대첩, 행주대첩 등과 함께 중요한 전승으로 꼽힌다.
정문부는 원래1565년 한양에서 부사 정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5년(선조 18년) 생원이 되었고, 1588년(선조 21년) 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그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고, 1591년 함경북도 북평사가 되어 북쪽의 여러 진을 순찰했다.
이때 왜란이 닥쳤고 당시 함경도 지역에서 관군이 계속 패하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급기야 국경인·국세필 등이 함경도에 피신했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왜적에게 넘겨주는 일까지 생겼다. 이런 혼란기에 의병을 일으켜 큰 전과를 이끈 주인공 정문부 장군의 운명도 대첩비만큼 사연이 많다는 점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하늘을 찌르는 공에 시기를 받은 정문부는 이 지역 최고 관직인 순찰사 윤탁연이 왜곡된 보고로 공을 깎아내리는 바람에 전적에 상응하는 대접도 못받았다. 전쟁 이후엔 갖은 모함에 시달리다, 인조 2년이던 1624년 이괄의 난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은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런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공적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여년이 지난 숙종 35년(1709)에 이르러서야 빛을 봐 북관대첩비가 세워졌고 1713년엔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얻는다. 정문부 장군 부부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37호)는 현재 의정부시 용현동에 있다. 의정부시는 장군의 5대조와, 부모의 묘도 있고 장군 생전 말년에도 살았던 인연이 깊은 곳이다.
'충의공 정문부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자'는 제1회 충의문화제가 오는 18일 묘역에서 열린다. 한국전통예절교육문화원(원장 안혜숙·51)이 주관하고 경기도와 의정부시가 후원하는 이번 행사는 청소년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려주고 전통문화를 익히게 해 올바른 인성을 길러주도록 기획된 것으로, 차 예절 경연대회·국악공연·태껸시범으로 꾸며진다.
행사 준비위원장인 안혜숙 원장은 "외국 문화가 범람해 우리 조상의 얼과 정신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며 "국민들에게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선 장군의 애국 정신을 알리고 전통문화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031)874-0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