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 민원실에 가면 문서 작성의 예시를 보여주는 '견본'에 어김없이 나오는 이름이 홍길동이다. 오늘날 홍길동은 한국인 '아무개'를 뜻하는 상징어가 됐다.

근래에는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그 생가 터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하지만 홍길동은 어디까지나 허균(許筠, 1569~1618)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조선시대 서얼의 한이 응축된 바로 그 이름인 것이다.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 소설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홍길동은 홍아무개 판서와 노비 사이에 태어난,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얼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등 적서차별을 받다가 집을 뛰쳐나온다. 도적떼를 모아 활빈당을 조직한 홍길동은 탐관오리와 불의한 토호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양민을 도와준다. 비바람을 부르고 둔갑술까지 부리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에게 매번 당하던 조정은, 결국 병조판서 자리를 미끼로 홍길동을 체제 안에 포섭한다. 그로써 '서얼금고법'은 소설 속에서나마 해소되고, '서얼허통'이 실현된다.

하지만 홍길동은 얄팍한 출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까짓 판서 벼슬쯤 과감히 내던진 그는 무리를 끌고 율도국(률島國)으로 가서 이상 국가를 건설한다. 적서 차별에 대한 저항에서 나아가 조선을 유지하고 있는 봉건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허균의 사상이 소설에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속의 진짜 홍길동은 누구일까.

우리는 흔히 소설의 주인공에서 저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허균은 서얼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은 대사간과 부제학을 지낸 관료이자 뛰어난 학자로, 당시 집권당이던 동인의 영수이기도 했다.

그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지만, 첩이 아니라 후실(後室)이었다. 그러므로 허균이 신분상 제약을 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마음만 먹으면 탄탄한 출세 길이 보장된 사대부였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허균과 소설 속 홍길동은 별개다.

그런 허균이 적서 차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스승 이달(李達, 1539~1618)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설이다.

백광훈, 최경창 등과 함께 조선 중기 '삼당(三唐)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달은 천한 기생의 몸에서 난 서얼이었다. 그래서 서얼금고로 인해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빼어난 시문(詩文)으로 달래며, 제자 허균에게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어줬다.

또 허균의 둘째형 허봉 또한 당쟁에 휘말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허균은 또 반골 기질이 다분한 서얼 친구 일곱 명과 잘 어울렸다. 이들 '칠서(七庶)'는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심우영, 서양갑, 박치의, 박치인, 이경준, 허홍인 등 명문가의 서얼들이었다.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 또는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칭한 이들은, 1608년에 서얼금고의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작성해 광해군에게 올렸다. 하지만 묵살 당했다. 그러자 이들은 1613년부터 여주 남한강 가에 모여 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문경새재에서 상인의 재물을 빼앗다가 근거지가 들통이 나서 박응서 등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대북파의 이이첨 등은 이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할 음모를 꾸민 것처럼 거짓 자백을 시켜, 인목대비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이 사건을 계축옥사, 또는 '칠서(七庶)의 옥(獄)'이라고 한다.

서얼의 한을 직접 풀고자 했던 칠서들은 결국 역모에 말려들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허균은 입조(入朝) 동기 이이첨에게 선처를 호소하며 칠서들의 구명활동을 벌였지만 간신히 자신의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칠서들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을 지게 된 허균.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서양갑을 비롯한 칠서들의 넋을 소설에 부활시켰다. 그가 곧 홍길동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홍길동전'은 칠서들의 영혼에 바친 헌정(獻呈) 소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