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가 유행이다. 지난 정부 때도 그렇고 지금 정부도 그렇다. 하지만 '실용'이란 단어가 주는 모호함은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실용(實用), 즉 쓸모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면 더 수월하게 먹을 수 있다는 수단적 유용함도 실용의 하나다. 이때의 실용이란 효용적, 효율적, 경제적인 의미와 상통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거짓말이나 도둑질과 같은 매우 얄팍한 방법조차도 '쓸모 있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인간다움'과 같은 고매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그와 같은 수단을 '쓸모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도둑질이나 거짓말과 같은 수단은 오히려 인간다움을 좀먹는 것일 뿐이기에 전혀 쓸모가 없다.

이처럼 '실용'의 의미가 모호한 것은 어떤 선택이 추구하는 목표의 차이에 기인한다. 따라서 정치적 실용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추구하는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흔히 정치적 목표는 도덕적 선, 혹은 윤리적 정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만약 정치를 도덕이나 윤리와는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치적 실용주의는 현실적으로 쓸모 있는 것을 선택해 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때 정치적 선택이란 보다 경제적인 것, 보다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는 과정이 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설령 그것이 도덕적 선이나 윤리적 정의와 대립한다 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정치적 행위이다.

반면 정치를 도덕이나 윤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실용주의적 정치란 앞서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도덕이나 윤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선(善), 혹은 정의(正義)와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갈등이 없는 사회를 위한 선택의 과정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도덕한 것이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미국에서 시작한 실용주의는 전자로서의 의미가 매우 강하다. 이때의 실용주의가 전제하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데, 여기에서 이성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이라기보다는 효율성이나 경제성의 추구를 주된 기능으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실용주의는 역사적 진보나 경제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가장 유용한 선택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근대 자연과학의 한계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지금은 성장의 의미를 새롭게 반성하고 있을 터이다. 당연히 '쓸모 있음'에 대한 이해도 보다 반성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쓸모 있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보라고 한 사람으로 장자가 있다. 일찍이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하여 많은 사람이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이어도 사실은 어딘가에 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 말의 속뜻은 인간의 편협한 판단을 벗어버리고 본래의 자연스러움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면 쓸모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의 경계가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의미다. 억측해 보건대, 그 옛날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서도 역시 실용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