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67m 높이의 허공에 강풍이 불었다. 24일 오전 9시30분쯤 서울 공덕동의 한국지방재정회관 옥상. 18층 건물 옥상을 둘러싼 2m 높이의 담에 '로프공(건물 외벽을 닦거나 페인트칠을 하는 인부)' 공재원(31)씨가 올라섰다.
도로를 내려다보면 아찔했다. 공씨는 잠시 몸을 기우뚱하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직경 18㎜짜리 로프 4개를 담에 부착된 고리에 묶고 로프 끝을 건물 아래로 던졌다. 그는 동료 3명과 함께 각각의 로프에 달비계(공중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매단 의자)를 하나씩 매단 다음 달비계에 앉아 시계추처럼 좌우로 4~5m씩 왔다갔다하며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외벽에 걸린 로프에서 '끼이익' 소리가 났다. 달비계에 하나씩 달린 5㎏들이 플라스틱 그릇에서 세제가 요동쳤다.
로프공들은 작업복 위에 보조로프를 묶는 고리가 달린 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다. 그러나 실제로 보조로프를 고리와 연결한 로프공은 한명도 없었다. 공씨는 "매번 보조로프를 매달았다 풀려면 작업시간이 배로 걸릴 뿐 아니라 꼭 달아야 한다는 규정도 없어 로프공 대부분이 보조로프 없이 작업한다"며 "위험하지만 일을 빨리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고층 건물 외벽을 청소하는 로프공들이 보호장비도, 안전규정도 없이 '안전 사각지대'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건물위생관리협회에 따르면 2009년 3월 현재 총 500여개의 고층 건물 외벽 청소업체가 영업 중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전국의 로프공 숫자를 최소 1000명에서 최대 7500명으로 잡는다. 빌딩 외벽 청소업체 10개 중 8개가 직원 수 5명 미만의 영세업체이다.
문제는 로프공의 안전을 챙기는 정부 기관이 따로 없다는 점이다. 로프공의 하루 일당은 다른 육체노동 업종에 비해 높은 편이다. 초보는 7만~8만원, 1년 이상 숙련공의 일당은 15만~16만원, '팀장'급은 17만~18만원이다. 4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을 맡으면 '위험수당'이 붙어 일당이 24만~25만원까지 치솟기도 한다. 다만 로프공은 봄·가을에 일이 집중되고, 여름·겨울엔 일감이 거의 없어 반년 동안 한 해 벌이를 해야 한다.
로프공 대부분이 안전을 무시하고 무조건 빨리, 많이 닦는 경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부가 정한 '산업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은 ▲안전모 착용 ▲안전 난간 설치 등 두루뭉술하게 돼 있다. 보조로프를 매달지 않는다고 규제할 근거도 없고, 로프 두께에 대한 규정도 없다. '추락 방지를 위해 달비계에 안전대를 설치하라'는 노동부 규정이 있긴 하지만 현장에서 이 규정이 제대로 준수되는지 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로프를 걸 만한 안전한 고리나 말뚝이 없는 빌딩도 많다. 이 경우 로프공들은 임시방편으로 로프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물을 찾는다. 로프공 황모(53)씨는 "얼마 전 아파트 옥상에 고리가 없기에 물이 꽉 찬 대형 물통에 로프를 묶었다"며 "물통에서 물이 새면서 물통이 '휘청'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또 다른 로프공 권모(33)씨는 "건물 옥상에 말뚝이 없으면 즉석에서 콘크리트못 서너개를 박은 뒤 로프를 매기도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해마다 봄·가을이면 대도시 도심 여기저기서 수십건의 '로프공 추락사'가 잇따르지만 정부는 대강의 통계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는 "건물 외벽 청소 같은 세세한 직종까지 통계로 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로프공 사망·사고건수를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5년 경력의 로프공 조진현(49)씨는 작년 10월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 빌딩 외벽을 청소하다, 함께 일하던 후배 정모(42)씨가 로프가 끊어져 추락사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조씨는 "그때 충격을 받아 생명보험에 가입하려 했더니 보험회사 상담원이 내 직업을 묻고 나서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며 "작년에만 내가 아는 로프공 6명이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로프공 추락사를 부추기는 또 다른 원인이 영세업체들 간의 출혈 경쟁이다. 한 외벽 청소업체 대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업체들이라 시간과 비용을 깎는 경쟁이 치열하다"고 했다. 경쟁사보다 적은 돈을 받고 이틀 걸릴 일을 하루에 마치겠다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안전은 뒷전으로 밀리고 추락사의 위험이 커진다.
로프공 추락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내는 유일한 통계가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 현황 조사다. 빌딩 외벽 청소업이 속한 직업군(職業群)은 '건물 종합관리사업'과 '위생 및 유사 서비스업'이다. 2007년 한 해 동안 해당 직업군에서 '추락사'를 이유로 신청된 산업재해 건수는 총 21건이다. 이들은 대부분 로프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 청소업을 제외한 나머지 업종이 ▲건물 소독 ▲해충 구제 ▲쓰레기 처리 등 추락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서울산업대 안전공학과 손기상(57) 교수는 "공단 조사는 산업재해 보험금을 신청한 사람이 몇 명인지 밝힐 뿐"이라며 "보험금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로프공 사상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손 교수는 "정부가 정확한 사고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외벽 청소업을 위험도가 낮은 다른 업종과 한데 묶어 놓은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며 "지금부터라도 로프공을 별도로 분류하고 사고 원인과 빈도를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