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UFC가 룰을 개정하고야 말았다.

그동안 바셀린 사용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던 UFC는 최근 '경기 중 커트맨만이 선수의 얼굴에 바셀린을 바를 수 있다'는 조항을 룰에 삽입했다. '커트맨이 선수를 봐주는 동안은 단 한 명의 세컨드만 옥타곤에 들어올 수 있다'는 추가설명도 명시했다.

모두 다 UFC94에서 '세기의 대결'로 주목받던 조르쥬 생 피에르(이하 GSP)와 비제이 펜과의 대결(한국시각 2월1일) 후 불거졌던 바셀린 도포 의혹 때문이다. 경기 중 라운드가 끝난 뒤 세컨드가 바셀린을 GSP의 얼굴에 문질렀고 그 손을 그대로 사용해 등 부분을 마사지하다 주체육위 감독관들에게 제지를 당한 것. 이후 경기가 GSP의 승리로 돌아가자 펜 측은 "몸이 미끄러워 태클은 물론 그라운드 기술을 걸기 힘들었다"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재 격투기는 신체 이외의 무기 사용을 금하고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수많은 무기들을 전부 사용하지 못한 채 오로지 '몸'만을 무기화시켜 대결을 펼친다. 하지만 가끔 바셀린 같은 의외의 무기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무기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무기처럼 쓸 수 있는 도구들이 분명히 있다.

▶비오듯 흘리는 땀도 무기가 될 수 있다.

사실 GSP의 바셀린 도포 사건은 국내팬들에겐 낯설지 않다. 2006년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추성훈이 당시 일본의 자존심 사쿠라바 가즈시에게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이후 보습제 도포 사건에 휘말리며 무기한 출전 정지 징계를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약한 얼굴 피부가 찢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바셀린 사용은 이미 복싱 등에서 일반화돼 있었다. UFC는 팔꿈치 사용이 가능한 만큼 더욱 필요한 용품이기도 하다. 날카로운 팔꿈치가 얼굴에 스치기만 해도 칼로 벤 듯 긴 상처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클과 관절기를 주로 사용하는 그래플러들에게 바셀린은 정말 쥐약이다. 그렇지 않아도 땀 때문에 팔과 다리를 제대로 잡기 힘든 판에 바셀린이 발려져 있다면 마치 온몸에 기름을 바른 채 뛰어다니는 돼지를 잡는 놀이처럼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두껍고 거친 재질의 도복이 존재하고, 그래플러들과 스트라이커간 이종 경기가 없을 때는 생각지도 못 했던 무기인 셈이다.

▶군화만 신어도 태권도 3단.

지난 해 12월31일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펼쳐진 크로캅과 최홍만의 경기. 당시 몇몇 격투기 전문가들은 크로캅이 신발을 신고 나오자 "오늘 킥으로 승부가 나겠군"하고 예상했다. 킥의 파워가 상상을 초월하는 크로캅이 신발이라는 '무기'까지 장착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라운드 상황을 유도할 것이 뻔한 최홍만의 태클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이유를 댔다. 신발을 신으면 마찰력을 이용해 상대의 태클에 좀 더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발을 신은 상태와 맨발에서의 킥의 위력은 맞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로 다가온다.

물론 크로캅은 이전에 맨발 하이킥으로 수많은 강자들을 물리쳐왔다. 하지만 그건 정타로 맞았을 때 이야기고 경기 중 수없이 나오는 빗맞은 타격일 경우 신발의 위력이 배가 된다. 공격자는 부상 걱정을 던 채 자신있게 킥을 하고 평소 발가락 끝에 맞는 것 정도에는 타격을 입지 않던 선수도 데미지를 받게 된다. 만약 누워 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파운딩을 방어하기 위해 발바닥으로 얼굴을 차는 경우라면 스치기만 해도 얼굴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할 수 있다. 반대로 그래플러들에게도 신발착용이 유리하게 작용할 때가 있다. 태클시 발이 미끄러지지 않기 때문에 힘을 온전히 상대를 압박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 '군화만 신어도 태권도 3단'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셈이다.

결국 UFC와 K-1에서는 엄격하게 신발 착용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프라이드와 이벤트성의 성격이 짙은 K-1 다이너마이트에서는 신발 착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복싱 글러브와 격투기 글러브의 차이

UFC 등에서 사용되는 격투기 글러브와 복싱 글러브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격투기 글러브에 비하면 복싱 글러브는 거의 사람 머리크기에 육박할 만큼 크고 무게 또한 무겁다. 일반적으로 K-1 등에서는 8온스 두께의 글러브를 사용하고 UFC 등은 4온스 정도의 규격을 사용한다.

과거 K-1 선수들이 종합격투룰에서 싸우게 될 경우 글러브 차이에 대해 많이 언급했었다. "이렇게 가볍고 얇은 글러브를 끼면 내 주먹에 상대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종합격투기에서 쓰이는 글러브는 주먹 보호용일 뿐이지 펀치 위력의 감소가 거의 없다.

K-1 글러브는 크고 두껍기 때문에 정타를 넣기가 힘들다. 게다가 무게 때문에 연타 속도에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격투기 글러브를 끼면 입식타격가에게는 날개를 단 격이다. 펀치 스피드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크기가 작은만큼 보다 정확한 타격이 가능하다. 큰 글러브를 끼고 있다면 한 번에 안면과 몸통 보호가 가능하지만 작은 글러브로는 동시 방어가 힘들기 때문에 펀치 궤도도 훨씬 다양해진다. 글러브의 차이 하나 때문에 손에 무서운 무기를 하나 쥐고 싸우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입식타격가에게 다 유리한 것은 아니다. 평소 방어가 된다고 생각한 펀치가 느슨한 가드를 뚫고 들어오기도 하고 입식타격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궤도의 펀치에 맞고 오히려 KO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외에도 추성훈이 경기 중 착용하는 유도복 등도 무기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또한 착용자의 실력과 상황에 따라 스스로에게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