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4시쯤 서울 목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영어학원 버스가 멎고 안모(7)군이 뛰어내렸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키 180㎝의 건장한 청년 한모(28)씨가 안군 손을 잡았다. 한씨는 안군을 집에 데려가서 씻기고 간식을 먹였다. 40분간 한자 학습지를 푸는 것을 도와주고 함께 비디오 게임을 했다. 오후 8시쯤 은행에 다니는 안군의 부모가 퇴근한 다음 한씨는 귀가했다.

한씨는 작년 여름방학부터 안군의 집에 출퇴근하는 '남자 보모', 일명 '매니(Manny)'다. 매니는 '남성(male)'과 '보모(nanny)'를 합친 신조어다. 그는 매주 월~금요일, 하루 4시간씩 안군을 보고 60만원을 번다. 다음 달 경기도 K대학을 졸업하는 한씨는 "막내아들이 서울에서 취직도 못하고 애나 보는 걸 알면 아버지가 당장 고향에서 잡으러 올 것"이라며 "서울에 살고 싶은데 취직은 안되고 생활비는 필요하니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남자 보모로 나서는 20~30대 초반 남성들이 늘고 있다. 취업 준비 중인 대학 졸업생, 용돈을 벌기 위한 대학생이 많다. 임금은 시간당 평균 6000~7000원으로 편의점 직원, 패스트푸드점 점원 같은 아르바이트(시간당 4000~5000원)보다 높다.

남자 보모는 미국영국 대도시의 전문직 맞벌이 부부들이 많이 고용하는 정식 직업인이다. 팝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Spears)가 남자 보모와 함께 외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남자 보모가 2003년 8500명에서 2006년 1만2500명으로 늘었다.

국내에서도 5~6년 전부터 남자 보모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베이비시터 알선업체 중 한 곳은 5년 전부터 50여 명의 남자 보모를 훈련시켜 파견하고 있다. 이 업체에 베이비시터 일자리를 구하러 오는 사람 10명 중 1명이 남자다. 다른 베이비시터 알선 업체들도 엇비슷하다.

6년 경력의 남자 보모 김모(29)씨는 두 달 전부터 언어 장애가 있는 남자아이(10)를 돌보고 있다.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로 남자 보모를 시작한 김씨는 대학 졸업 후 1년쯤 중소기업에 다니다 지난해 회사가 부도난 뒤 남자 보모로 복귀했다. 김씨는 "다시 취업하고 싶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다"며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느니 애랑 둘이 있는 남자 보모가 스트레스가 적다"고 했다.

남자 보모를 쓰는 사람은 5~11세 아들을 둔 맞벌이 부부가 많다. 여자 베이비시터가 감당하기 어려운 장난꾸러기, 장애아 등을 맡긴다. 아버지가 바빠서 아이와 놀아주기 힘든 집, 외아들을 키우는 집도 아버지와 형 역할을 해줄 남자 보모를 구한다. 2005년부터 아르바이트로 남자 보모를 해온 서울 K대학 일문과 재학생 구모(26)씨는 "지금까지 5명을 돌봤는데, 그 중 4명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버지를 둔 외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 보모를 평생 하겠다는 사람은 적다. 남들이 얕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고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가족이 노발대발할까 봐 남자 보모로 일하는 사실을 숨기는 사람도 많다. 한 남자 보모(29)는 "친구들에게도 말을 못한다"며 "아는 사람들이 내가 아이 보는 장면을 목격할까 봐 전전긍긍한 적도 많다"고 했다.

주희진 리더십다양성센터 대표는 "성별 분업의 장벽이 점차 누그러지고, 부모들이 '놀이 선생님', '학습 지도 선생님'처럼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원하는 추세에 맞춰 남자 보모라는 틈새 시장이 형성된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