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찰스 로버트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는 다윈주의를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의 모임 '다윈 포럼'과 함께 '다윈이 돌아왔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오늘날 경제학, 심리학, 법학, 문학, 종교, 예술, 여성 등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서 새롭게 21세기 지식의 담론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상을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차례로 집필한다.
1859년 11월 24일 영국 런던의 존 머레이 출판사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판매용으로 찍은 1170권의 초판은 꺼내놓기가 무섭게 당일로 몽땅 다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우며 당시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탄생이 창조주의 은총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나타난 결과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엄청난 도발이었다.
2000년 서양 역사의 사상적 기반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 철학과 기독교 신학이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은 영원불변의 전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전형으로부터의 변이(變移)는 진리의 불완전한 투영에 불과하다. 금이 은으로 변할 수 없듯이 생물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다윈은 플라톤이 진리의 불완전한 그림자로 지정한 변이야말로 이 세상에 실존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다름이 곧 아름다움이며 삶의 새로움을 잉태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다윈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다윈의 진화론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이론은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50년간 끊임없이 계속된 담금질로 인해 다윈의 진화론은 이제 생명의 의미와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이론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진화론은 이제 생물학의 범주를 넘어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등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물론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과학사학자들은 이들 두고 '다윈 혁명'이라 부른다. 일찍이 유전학자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대공황의 공포로 밀어 넣는 요즘 경제학의 지평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경제의 주체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과 심리에 관한 과학적 분석이 결여된 경제학이 논리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법학도 드디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 거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 홀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먼 훗날 훨씬 중요한 연구 분야들이 열릴 텐데, 심리학은 전혀 새로운 기초 위에 놓일 것이다." 요즘 각광 받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정신도 엄연히 진화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들과 진화생물학을 통섭(統攝)하고 있다.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12년 후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자연선택론에 덧붙여 성선택론(性選擇論)을 소개하며 남성중심의 사회질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에서 내가 전개한 호주제 논의는 다름아닌 다윈의 성선택론의 연장이었다. 지극히 기계론적인 현대의학도 진화생물학과 손을 잡고 조금씩 다윈의학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어린 시절 밤 늦게 다윈 토론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가슴 벅찬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고 한다. 문학비평에도 다윈의 입김이 뜨거워지고 있다.
다윈이 돌아왔다. 《왜 다윈이 중요한가?》(바다출판사)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우리 시대를 주저 없이 '다윈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는 근대를 대표하는 세 석학,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중에서 다윈만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 그의 이론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모름지기 훌륭한 이론은 간결하고 쓰임새가 다양하며 우아해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은유와 유비로 가득 찬 아름답고 탁월한 이론이지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이론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감탄한다. "그처럼 단순한 시작(So Simple a Beginning)으로부터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수많은 모습의 생명들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니!" 우리는 감탄한다. "이 엄청난 생명다양성의 진화가 그처럼 단순한 이론(So Simple a Theory)으로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니!"
다윈 포럼은?
'다윈 포럼'은 찰스 로버트 다윈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통섭(統攝·Consilience)을 지향하는 학자들의 모임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통섭'은 '전체를 도맡아 다스린다'는 뜻이다. 미국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저서 《통섭》을 통해 인문사회과학과 예술은 진화학·유전학·뇌과학 등의 도움을 얻어 재해석되고,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지식인 사회에 학문 통합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05년 결성된 다윈 포럼은 다윈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 등을 함께 연구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국내에 '통섭' 개념을 소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교수(통섭원 원장)를 비롯해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 위원(과학사), 최정규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진화경제학), 강호정 연세대학교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생태학), 장대익 동덕여자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생물철학), 김성한 고려대학교 철학과 강사(철학과 윤리), 전중환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연구원(진화심리학), 이상임 서울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연구원(행동생태학), 김태원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연구원(행동생태학) 등으로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