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사업이 위기국면을 맞게 된 책임이 남북 어느 쪽에 있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특구(特區)를 통해 밀려드는 개방 물결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불안감이라는 분석이다. 개성공단에 앞서 추진됐던 나선(나진·선봉) 경제특구와 신의주 특구 등도 모두 실패했고, 이를 추진했던 '개방파'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개성공단 역시 이명박 정부 출범 이전부터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특구는 북한 개방파의 무덤"(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란 말까지 나온다.
북한이 경제특구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보다 "개혁·개방에 대한 의지 없이 돈만 챙기려 했기 때문"이란 전문가들의 분석이 많다. 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7일 "북한은 자본주의란 벌레는 막고, 외자(外資)란 공기만 받겠다는 '모기장 개방'을 추진했다"며 "최근 개성공단 출입 통제에 앞서 '겹 모기장을 치라'는 결정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한 1991년 12월 "함북 나진·선봉지구에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외자를 유치해 2010년까지 중계무역·금융·관광의 거점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북한은 이 지역을 개방한다고 떠들면서 외곽에 3300볼트의 고압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쳤고, 주민 이동을 국가보위부(체제 안전 담당)가 직접 통제했다. 1998년에는 외국기업의 광고탑을 일방적으로 철거한 뒤 정치 선전탑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특구 사업을 총지휘했던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장(장관급)은 시장경제 도입을 주장하다가 1998년 이후 행방불명됐다. 그 뒤를 이은 김문성 무역성 부상은 부패 혐의로 2001년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표적 경제 관료였던 김달현 부총리도 1992년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가 개방을 언급했다가 이듬해 공장 지배인으로 쫓겨난 뒤 2000년 자살한 것으로 전해졌다.
2000년 이후 개성공단과 남북 경협에 관여했던 북측 인사들 역시 작년 말부터 모습을 감추고 있다. 개성공단 북측 책임자였던 주동찬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장은 지난 3월 경질됐다. 남북 경협의 책임자였던 정운업 민족경제협력위원장은 작년 말 부패 혐의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북측 주역인 최승철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도 올해 초부터 안 보인다. 박봉주 내각 총리의 경우, 자본주의 요소를 일부 도입한 '7·1 경제개선 조치'(2002년)에 앞장섰지만 작년 4월 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