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전하는 사회고발

획기적인 입체파 작품들로 유명한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 그는 개인적 취향의 감상적인 작품과 실험적인 작품들만을 그렸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 또한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피카소가 1937년에 스페인 내전(1936~39)을 소재로 그린 '게르니카(Guernica)'와 1951년 한국전쟁(1950~53)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대학살' 등이 그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는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그러던 중 1937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나치 독일 공군기들의 폭탄 세례를 받고 폐허로 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나치독일은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중 파시스트인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면서 곧 벌어질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한 폭격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게르니카는 2000명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를 낸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캔버스에 유채, 349.3×776.6 ㎝, 1937,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왕비미술관 소장

■전쟁과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

당시 피카소는 그 해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전시관의 벽화 제작을 의뢰 받아 프랑스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국의 비보를 접한 피카소는 한 달 반 만에 폭 7.8m, 높이 3.5m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한다. 다만 폭격 그 자체를 묘사하지는 않았다. 목이 베인 군인, 죽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절규, 부러진 칼을 꼭 쥐고 있는 잘린 팔, 말 아래에 짓밟힌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표현했다.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는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표현했고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들을 단순한 형태로 그리고 흰색, 검정색, 회색, 황토색 등 애도의 뜻을 상징하는 색상만을 사용해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나타냈다. 또한 피카소는 비난 받아야 할 것은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이 아니라 실제로 폭격을 사주한 스페인 프랑코 군부임을 고발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장교가 게르니카의 사진을 가리키며 "당신이 그린 것이냐"고 묻자, 피카소는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그린 것이오"라고 대답한다.

게르니카는 그 해 파리 만국박람회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순회 전시됐다. 그리고 독재와 탄압, 폭력에 침묵하던 세계의 지성인들이 무력에 항거해 일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작품은 곧 전쟁의 비참함을 다룬 작품 중 가장 힘이 넘치는 걸작이자,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내전으로 인한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인류의 정의가 실패할 수 있음을, 인간의 정신이 폭력에 꺾일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허망하게 산화될 수 있음을 스페인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게르니카'의 귀환

유럽 순회 전시를 마친 뒤 '게르니카'는 프랑코 정부 지배 아래에 놓인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림의 스페인 반입을 거부했다. 1939년, 그는 "스페인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회복된 후에만 그림이 스페인에 돌아갈 수 있으며 반드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돼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렇게 될 때까지 이 작품을 뉴욕 현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한다"고 딱 잘라 선언했다. 프랑코의 독재가 계속되는 한 조국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결국 '게르니카'는 1981년 9월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라는 신문의 헤드라인과 함께 그림이 완성된 지 44년 만에 스페인에 반환됐다. 피카소 사후 8년, 프랑코 사후 6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반환 후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됐다가, 보관상의 문제로 1992년 소피아왕비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더 생각해볼 문제

1. 더욱 사실주의적으로 진화하는 사회고발성의 예술 작품들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2. 이러한 사회고발성의 예술 작품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