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한(漢)나라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창녀를 뜻하는 창(娼)자가 없다. 중국 양(梁: 502~557)나라 때 고야왕(顧野王)이 편찬한 '옥편(玉篇)'에 비로소 창(娼)자가 실려 있는데, 음탕할 탕과 같은 뜻이라고 적고 있다. 그럼 한(漢)나라 때는 창기가 없었던 것일까?

'설문해자'에는 대신 창(倡)자가 실려 있다. 창(倡)자는 '여자 광대'란 뜻인데, '설문해자'는 악사(樂師)를 뜻한다면서 '한나라 궁중의 황문(黃門:내시)에는 명창(名倡)이 있었는데, 이것이 창(倡)'이라고도 설명한다. '설문해자'는 배부르다는 뜻의 우(優)자의 다른 말도 창(倡)이라며, 이것이 배우(俳優)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옛날의 창기는 전문 음악인이나 배우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경주부(慶州府)조에는 김유신(金庾信)이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창녀 천관(天官)과 발을 끊었는데, 취중에 말이 습관대로 천관의 집으로 가자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최소한 신라 때도 창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오릉(五陵) 동쪽의 그녀 집에 천관사(天官寺)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단순한 창기가 아니라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던 전문인임을 유추하게 해 준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는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惠民署)의 의녀(醫女)나 의복과 재물을 맡아보던 상의원(尙衣院)의 침선비(針線婢)가 모두 관기(官妓)로서 연회 때에 가무를 한다고 적고 있다.

유교가 조선의 국교로 자리를 잡아가던 세종 때 조정에서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는 방안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대신 허조(許稠:1369~1439)는 "평생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여색에 초월한 사람이어서 폐지를 역설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 금할 수 없는 것"으로 만약 창기를 없애면 "선비들이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것"이라며 폐지불가를 역설해 없애지 않았다고, 조선 초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는 전한다. 경찰이 집창촌과 전쟁에 나서면서 매춘이 원룸이나 가정집 등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중요함을 말해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