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세력의 근거지인 유향소 복립을 눈앞에 두고 훈구 세력 사이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1482년 2월 2일. 좌부승지 성준이 성종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유향소는 전날 이시애의 반란에 연루되어, 세조께서 혁파하셨던 것이옵니다. 복립을 해도 나라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며, 한갓 세력을 빙자한 작폐(作弊)에 지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성준이 꺼낸 히든카드는 바로 '역모 관련설'이었다. 사실 유향소가 이시애의 난과 직접 관련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다만 풍속을 지키고 향리의 부정을 막아야 할 유향소가 수령과 결탁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허다했다. 예컨대 충주에서는 탐관오리를 고발한 백성을 유향소가 먼저 나서서 몽둥이찜질을 하여 언로를 막아버린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것이 세조가 유향소를 혁파한 진짜 이유였다.

그 내용이 확인된 바는 없었지만, '역모'라는 말에 성종은 마음이 움찔했다. 그리하여 성종은 "선왕의 뜻을 따르지 아니할 수 없다"며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러다가 1482년 12월 16일. 사림파인 조위가 풍속의 문란함을 들며 유향소 복립을 다시 주장했다.

"근래에 풍속이 각박해 숙부의 첩과 간통하고, 심지어는 서자가 적모(嫡母, 아버지의 정실부인)와 간통하는 자가 있사옵니다. 청컨대 유향소를 회복시켜 향리를 규찰케 하소서."

반인륜적 사건에 대하여 성종은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격분했다. 그러나 유향소는 선왕조에서 이미 폐한 것이니 회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조위의 간언은 결국 유향소에 대한 성종의 무관심을 한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지방자치 강화를 위한 사림 세력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1484년 4월 23일. 형조의 관리들은 유향소 대신 고려시대 지방관인 사심관의 부활을 제안했다. 사림 측에서 내놓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정창손· 윤호·이극배 등 훈구세력은 그 안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사심관은 고려조의 폐법(弊法)으로, 그 폐단이 유향소보다 더 심할 수도 있사옵니다. 더구나 덕망 있는 사람도 찾기 어려우니 다른 계책을 강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종은 훈구파의 의견에 따랐다. 사심관 부활에 대한 사림파의 제안은 묵살됐다. 하지만 다음달 5월 7일.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유향소 복립을 본격적으로 청하면서 유향소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고려 태조는 청렴한 선비를 뽑아 향리들의 불법을 규찰케 함으로써 간사한 아전이 저절로 없어지고, 5백 년간 풍속이 유지되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유향소가 혁파되자 간악한 아전들이 불의를 자행하여, 건국 1백 년도 못돼 풍속이 쇠해졌습니다. 열 집이 사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다는데, 어찌 한 고을에 착한 선비가 없겠습니까? 청컨대 다시 유향소를 설립하여 향풍(鄕風)을 규찰하게 하소서."

성리학의 대가로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라 일컫는 점필재 김종직. 그는 성종 초에 경연관으로 출사했다가 함양 군수와 선산 부사 등 외직을 거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다시 경연을 담당하며 성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김종직이 유향소 복립의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어정쩡한 답을 내린다.

"조정에서 수령을 가려 뽑으려 해도 적임자를 얻기 어려운데, 어찌 알맞은 자를 얻기가 쉽겠는가? 시골 풍속이 아름답지 못함은 나라 조정에 관련이 있으므로 나는 이것을 근심한다."

그러자 몇 달 뒤인 11월 12일, 김종직은 다시 유향소 복립을 건의했다.

"고부에서는 길 가는 군수를 향리가 막대기로 때리고, 또 그 가족의 물건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아들이 아비를 때리고, 아비가 그 아들을 관아에 고소한 자가 있으니, 풍속의 문란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풍속을 해쳐도 이를 검찰(檢察)하는 자가 없사옵니다. 고려 때 사심관으로 풍속을 유지하였듯, 유향소를 설치하여 요박(�薄)한 풍속을 바로 잡게 하소서."

그러자 성종은 답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유향소를 다시 세우면 폐단이 반드시 심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모든 고을의 유향소에 어찌 모두 적당한 사람을 얻겠는가?"

김종직이 다시 아뢰었다.

"검찰하는 자가 폐단을 만들면 관찰사와 수령이 있습니다. 또 아무리 작은 고을이라고 하더라도 이치를 아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골라서 검찰하면 풍속을 해치는 무리가 거의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역모 관련설을 믿은 성종은 끝내 유향소를 허용하지 않았다. 유향소 복립 문제는 한동안 잠잠해졌다. 조정은 겉으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사회적 병폐를 고발하는 상소가 연일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