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식·정치부 차장

최근 한국 외교는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롤러 코스터' 탑승객 신세였다. 외교안보 라인 전체가 문책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살아났다. 외교 무대에서 자주 보기 힘든 속도감 넘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직접 탑승했던 우리 외교관들은 냉정을 유지하기 힘든 모양이다. 부시(Bush) 미국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에서 한국의 영유권을 잠정 인정하는 옛 표기로 엿새 만에 되돌려 놓은 직후, 외교관들은 나름의 탑승기를 쏟아내느라 분주했다. 콘돌리자 라이스(Rice) 미국 국무장관의 전용기로 전화를 걸어 독도 표기 변경의 부당성을 설득했던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이야기나, 이태식 주미(駐美) 한국대사가 미국 조야의 인사들을 만나느라 동분서주했던 것 등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비화들이 나오고 있다.

외교관들만 흥분한 게 아니다. 정권 출범 후 5개월여의 시간 동안 잇단 악재로 신음하던 이명박 정부 전체가 외교가 일궈낸 극적인 반전을 반기고 있다. 이를 탓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정부가 심기일전해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이번 파문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해서 무조건 박수만 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미국 BGN의 독도 표기 변경과 재수정에 담긴 역설 때문이다. 먼저 우리 외교력이 총동원된 끝에 이뤄낸 성과는, 일주일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되돌아간 상황이라는 게,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명문화한 것이 아니라, 한국령인 바다에 있는 분쟁 지역의 의미가 담긴 '리앙쿠르 암(巖)'이란 표기를 다시 쓴 것이다. 우리로선 만족하기 힘든 이 표기를 더 악화된 쪽으로 고쳤다가 일주일 만에 되돌려 놓은 게 이번 사태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외교는 새삼 미국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게 됐다. 지난 10년 동안 두 번에 걸친 정권이 우리 외교·안보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비중을 줄이느라 동분서주했지만, 동북아에서 세계 유일의 수퍼 파워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남북관계만 봐도 그렇다. 남북관계를 강화해 한미 동맹의 우선 순위를 낮춰보려 했지만, 미국만 상대하려는 북한의 태도는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게다가 이번 독도 파문을 거치면서 미국은 이 문제에서까지 '심판의 지위'에 올라선 듯한 느낌을 준다. BGN을 비롯한 미국 기관들의 독도 표기에 우리는 물론 일본까지 총력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오는 5일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한미 양국은 앞으로 주한미군의 미래 지위와 방위비 분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지원 문제, 북한 핵 등 대형 현안들을 다루게 돼 있다. 현재로선 미국이 독도 문제를 카드로 쓸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동맹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선 부쩍 커진 미국의 존재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세상 일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한국을 향해 국력 신장에 맞는 역할 분담과 기여를 요구하고 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독도 파문의 극적인 반전을 일궈내기 직전까지 잇단 무능과 실책을 드러냈던 우리 외교가 이런 파고들을 넘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환호와 안도가 아니라 자기 반성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롤러 코스터 위에서 일희일비하는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