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방지를 위해 태아(胎兒)가 아들인지 딸인지 부모에게 의사가 알려주지 못하도록 국가가 규제하는 것이 옳은가. 이는 태아 성별이 궁금한 부모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21년 전 만들어져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해온 의료법 조항이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올랐다. 10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리는 공개 변론에는 의사와 법학교수들이 2명씩 나와 위헌(違憲)쪽 입장인 대한의사협회와 합헌(合憲)쪽 입장인 보건복지가족부를 대변해 '변론'할 예정이다.

◆변호사와 의사가 헌법소원 제기

태아 성 감별 등을 금지한 조항은 구(舊) 의료법 19조의2 규정(개정 의료법 20조)이다. 1987년 이 조항이 신설될 당시 '남아 선호 사상' 때문에 태아가 딸인 것으로 드러나면 낙태하는 것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태아의 성을 알려준 의사에 대해서는 면허 취소와 징역형 등 강력히 처벌했다.

이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람은 2명. 그중 한 명은 법무법인 화우의 정재웅 변호사(36)다. 부인이 임신 9개월째인 2004년 12월 정 변호사는 의사에게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성별을 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의사는 의료법을 들어 거절했다.

5일 뒤 정 변호사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정 변호사는 현재 독일 연수 중이라 그의 법무법인 동료들이 사건을 맡아 진행 중이다.

다른 한 명은 2005년 5월 산모에게 태아의 성별을 가르쳐 줬다가 '의사 면허 자격 정지 6개월' 처분을 받은 서울의 개인 병원 의사다. 이 의사는 서울행정법원에 이를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재판부에 의료법 19조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했다. 이에 2005년 11월 이 의사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시대 착오적인 법률"

이들 주장의 요지는 '태아의 성별을 출산 때까지 알려주지 않는 것은 의학적 측면에서 불합리하고 시대 착오적'이라는 것이다.

9일 정 변호사를 대신해 사건을 맡은 박상훈 변호사는 "의학적으로 볼 때 태아가 5~6개월 이상 성장한 후의 낙태는 임산부에게 매우 위험하므로 낙태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8~9개월이 지나면 낙태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낙태가 불가능해진 시기까지 성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태아 가족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소를 제기한 의사는 "아들과 딸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사회적 현상에 비춰 딸이라고 낙태할 우려가 있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며 "형법상 낙태죄만으로도 낙태방지 목적이 충분히 달성된다"는 입장이다.

두 사람의 주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태아 성 감별을 막는 법 조항이 이미 사문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상당수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홍색 옷을 준비하라(딸)", "장군감이다(아들)"라며 태아의 성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련 기관은 입장 엇갈려

대한의사협회는 "임신 말기 낙태의 위험성은 크게 줄어들므로 유아용품 준비에 필요한 정보를 주는 차원에서 임신 28주 이후부터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헌재에 제출했다.

산부인과의사회 장석일 총무이사는 "의사가 진료를 통해 얻은 정보는 환자 본인에게 알려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태아 성 감별 금지조항을 어긴 경우(징역 3년 이하형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가 낙태(징역 2년 이하형)보다 형량이 무거운 것도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보건복지가족부는 "남아 선호 사상이나 남녀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 등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태아 성별 고지(告知)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는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서울행정법원도 2005년 "어차피 출산을 하겠다는 부모라면 성별을 몰라서 입는 피해라고 해봐야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출산 준비에 불편함을 겪는 정도"라며 "낙태를 방지하고 남녀 성비 불균형을 바로 잡는 공익성이 있기 때문에 위헌이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성감별 금지는 중국 밖에 없어

세계적으로 태아 성감별을 금지하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중국 밖에 없다. 강력한 인구억제 정책으로 두 자녀도 두기 힘든 중국은, 남아선호사상이 아직도 강해 성감별이 허용되면 낙태율 증가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아들·딸을 가리지 않는 부부들이 늘었다. 2006년 현재 남아와 여아의 성비는 106대 100으로 자연 성비에 가깝다.

2006년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2005년 한해 낙태 시술 건수는 35만590건으로 추산되며, 이중 미혼여성의 낙태가 42%였다. 미혼여성의 낙태는 태아의 성별과는 별 상관이 없다.

기혼 여성의 경우에도 낙태의 주된 이유로 '터울 조절(75%)'과 '경제적 어려움(17.6%)'를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