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이 남달랐던 그가 어느 날 카세트 테이프 한 개를 내밀었다. 생일 선물이었다. 테이프엔 그가 직접 녹음해 편집한 60분짜리 사제(私製) 프로그램이 담겨 있었다. 로고송으로 시작해 인기 높던 팝 음악이 흐르고, 가상의 청취자 사연까지 넣은 테이프를 들으며 뭉클했던 사춘기였다.

라이선스 LP가 많지 않던 1980년대, 광화문과 이태원에는 수입 원판을 테이프에 무단 복제해 진열까지 해놓고 팔던 음반가게가 있었다. 음반 표지와 속지 대신 주인 아저씨가 볼펜으로 쓴 곡목밖에 없었으나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애지중지 들었다. 금지곡이었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나 핑크 플로이드 '더 월(The Wall)' 앨범도 이렇게 들어야 했다.

유희열이 심야방송 'FM 음악도시'를 진행하던 시절, 팬으로부터 라면상자 크기 박스에 담긴 선물을 받았다. 상자 속엔 '음악도시'를 녹음한 테이프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를 꺼내 틀어 보니 자신이 방송했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오늘 정말 추웠죠. 다들 감기 안 걸리셨어요?" 그리고 이어진 낯선 여자 목소리. "네, 오빠. 오빠도 감기 조심하세요." 혼비백산한 유희열은 '스톱'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다정했던' 이 선물 역시 카세트 테이프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 불과 10년 안팎 일이다.

호주머니 궁한 10대들과 운전자들의 친구였던 카세트 테이프가 올해 탄생 45주년을 맞았다. 필립스가 '콤팩트 카세트'란 이름으로 유럽에 처음 출시한 것이 1963년. 80년대 초 '콤팩트 디스크(CD)'가 등장한 뒤 테이프는 줄곧 내리막을 걸었다. 국내에선 2001년까지만 해도 음악시장에서 카세트 테이프(51%)가 CD(49%)보다 많았다. 이 비율은 2006년 32% 대 68%로 벌어졌다. 테이프를 몰아낸 CD 역시 MP3에 더 빠른 속도로 밀리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향수를 자극하는 제품이 나왔다. 테이프 모양 케이스에 64MB짜리 USB 키를 끼워넣은 물건이다. 곡목은 예전처럼 손으로 쓸 수 있게 했다. '따뜻한 소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LP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카세트 테이프도 쉬 잊혀지지는 않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