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원리의 세계를 판단하는 이판(理判)보다도, 현실세계의 일을 판단하는 사판(事判)이 훨씬 어려운 것 같다. 신라 원효(元曉)의 대표작이자,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아시아 불교계의 스테디셀러였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보아도 그렇다. 이판을 다루는 진여(眞如)의 항목보다도, 사판을 다루는 생멸(生滅)의 항목이 훨씬 양도 많고 배열도 복잡하다.

사판이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번에 벌어진 티베트 사태를 보아도 그 판단이 쉽지 않다. 전생에 이미 '이판사판'의 도(道)를 통한 뒤에 다시 환생했다고 하는 달라이 라마도 아마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순응할 것인가? 싸우자니 수많은 동포들이 죽어나가야 하고, 순응을 하자니 굴욕과 착취가 기다리고 있다. 삼세인과(三世因果)라고 하는 이판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사태는 전생업보(前生業報)로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다.

구전에 의하면 수백년 전에 이미 티베트의 예언자들은 "라싸에 철조(鐵鳥·iron bird)가 날아올 때, 티베트의 가르침이 세계에 퍼지리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때는 '아이언 버드'가 어떤 의미인지를 몰랐었다.

새면 그냥 새지, 쇠로 된 새가 있는가? 그러다가 50년대 후반 중국이 들어와 라싸에 비행장을 만들고, 비행기가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서 그 예언을 깨달았다고 한다. 중국의 '아이언 버드'(비행기)가 날아 오면서 티베트의 승려들은 압박을 피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민족의 독립과 자치라는 현실세계 사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피를 흘리고 싸워야 될 사안이다.

현재 달라이 라마의 판단은 강경투쟁보다는 온건협상 쪽으로 가고 있다. 당연히 강경파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판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카리스마도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비슷한 사례가 될 것이다. 서산대사는 승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다. '나라를 위해 진리를 판' 셈이다. 같은 시대 고승으로 서방산(西方山)에 머물고 있던 진묵(震默)은 끝까지 승병에 참여하지 않았다. 후일 진묵은 서산을 '명리승'(名利僧)으로 평가하였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