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종기(70)씨의 가족들은 채씨의 범행 사실에 놀라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6년 3월, 20년 동안 살아온 고양시 일산동 채씨의 집이 강제로 철거를 당한 이후 보상문제에 이상할 만큼 강한 집착과 피해의식을 보이면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상 집착의 시작

채씨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었다.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이지만, 젊었을 때 독학으로 주역을 공부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에서 3년 전까지 철학관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이 지역의 한 역술인은 "채씨가 점을 잘 본다는 소문이 있어 손님이 많았다"고 전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채씨는 담배는 피우지 않고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소주 한 잔 정도만을 마셨다고 한다. 특히 평소엔 말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01년 채씨의 단독주택이 도로로 국가에 수용되면서 채씨는 달라졌다. 채씨는 보상 액수를 높여달라고 당국에 집요하게 요구했다. 고양시청 김기태(도시정비과)씨는 "채씨가 2주일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찾아왔다"며 "나중엔 시청 공무원 전부가 채씨의 얼굴을 알아 볼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채씨가 항상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떤 설명을 해줘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을 만큼 고집스러웠다"고도 했다. 구청직원들이 돌아가며 채씨 집을 찾아가 보상액수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가족들도 그런 채씨를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상금으로 편하게 아파트에서 살자는 채씨의 처 이모(70)씨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때마다 채씨는 "내가 평생 모아 가진 재산이라고는 이거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도로 건설사인 현대건설에는 "죽어버리겠다" "자해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채씨는 이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 서울과 고양시에 살며 이사를 수없이 다녔다. 결국 2006년 3월, 30명의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 집을 때려부수자 이씨는 "이렇게까지 된 것은 당신탓"이라며 채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후 채씨는 이씨에게 강화도 하점면에 집을 마련해 줬고 이 집에서 이씨와 함께 살며 사실상 부부 생활을 계속했다.

채씨가 사회에 대한 증오심과 피해의식을 본격적으로 나타낸 것은 그 직후다. 전처 이씨는 "'내가 경찰 직원만 됐어도 감히 집을 뺏기겠느냐'며 경찰과 시청, 청와대를 욕했다"고 전했다. 또 딸(49)에 따르면 "국가가 가진 놈 편만 든다" "나쁜 놈들, 내 집을 이렇게 뺏아가냐" "왜 현대만 옳고 나는 그르냐"라는 말을 자주했다는 것이다.

채씨는 창경궁 방화 이후 문화관광부가 수리비용 2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자 더 억울해 했다. 아들(42)은 아버지가 평소에 "왜 죄 없는 나만 죗값을 치르냐", "평시에 아무것도 모르고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우리에게 왜 이렇게 못 살게 하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릇된 이상 집착과 피해의식

채씨의 이상 집착과 피해의식은 집이 철거된 후 강화군 하점면에 와 살면서도 계속됐다. 작년 1월 채씨는 김도일(49)씨가 운영하는 목장 분뇨탱크 때문에 물에서 악취가 심하게 난다며 하점면 사무소에 진정을 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3~4차례는 면사무소를 찾았고, 강화군청에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이틀에 한 번 이상 찾아오는 채씨 때문에 바로 목장을 조사하기도 했지만,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작년 3월 상수도 검사까지 정상으로 나왔는데도 채씨는 작년 6월까지 계속 민원을 제기했다.

방화 두 달 전에 채씨가 집에서 편지지에 적은 글에는 국가와 사회를 비난하며, 자신이 피해자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편지엔 "나는 정부에 억울함을 수차례 진정하였으나 한 번도 들어 주지 않았다" "두 번이나 재판을 받았는데 합의부 판사는 한 번도 합의에 부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회사편만 들어 판결하는 판사는 없어져야 한다" "정부나 법에서는 옳은 말은 들어 주지 아니 하고 거짓말은 그렇게 잘 들어주는지"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는 채씨를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이들은 계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특징이 있다"며 "사회에 대한 비합리적인 불만과 피해의식이 계속 증폭되어 결국 남대문 방화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