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만이었다”고 썼다. 정약용은 “심양(瀋陽)으로 끌려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 붙잡힌 자는 여기 포함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다”고 적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6%가 전쟁포로로 끌려간 셈이다.
조선인 포로들의 삶은 처참했다. 한겨울에 200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면서 청군에게 말채찍으로 얻어 맞기 일쑤였다. 언 살에 채찍을 맞으니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청나라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조선인 포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갔다. 노예매매 시장을 지켜본 소현세자는 ‘심양장계’에서 “(돈을 치르고 포로에서 면하는) 속환에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다. 많으면 수백 또는 수천 냥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희망을 잃었고,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 찼다. 날마다 관소(館所) 밖에서 울며 호소하니 참혹하여 차마 못 보겠다”고 적었다.
저자는 ‘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자료들에 나타난 사실을 바탕으로 조선 백성의 수난사를 서술한다. 조선의 아낙인 김분남, 백정 길영복 같은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생동감을 더했지만 모두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사실(史實)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봐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무·공보수석과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저자는 198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 연수시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연구를 시작했다 한다. 대학의 한 인권 세미나의 결론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은 17세기에도 자기 국민을 청의 요구에 따라 공출하듯 1년에도 수십 명씩 바쳐온 나라인데, 오늘이라고 해서 새삼 이런 나라에서 인권을 찾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