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우생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첫째로 1900년 대 초의 우생학에 근거한 사회적 제도는, '우성인자를 증가시키는 정책'을 쓰기보다는 '열성인자의 제거'에 중점을 두었고, 그렇기 때문에 '단종법'이나 '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1900년대의 정치가들은 왜 우성인자 수를 증가시키는 방향보다 열성인자들을 제거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을까? 그 이유는 당시의 정치가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바는 인류애에 바탕을 두고 모든 인간이 함께 발전해 나가는 방향보다는 오직 자신들이 속해있는 사회계층이 발전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생학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점이다. 1회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선진국이 만들었던 지능테스트는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항목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 문화를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지능이 낫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능이 높은 사람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능이 높다는 것 자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지능이 높다고 해서 사회적 적응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며, 심성이 더 착한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 공부를 더 잘한다는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지능지수가 높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회적 적응을 위해서는 지능보다도 '감정지수(EQ)'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감성지수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향으로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능은 노력에 의해 발전될 여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재능들이나 노력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단지 유전적 지능에 의해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를 규정하는 일은 과학의 이름을 빌린 운명론인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우생학의 세 번째 단점은 ‘발전이라는 이름의 허상’이다. 사실 인류는 굳이 1900년대 초에 유행한 생물학적 우생학뿐만 아니라, 비록 시대에 따라 잘난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조금씩은 달랐지만 ‘가문’ ‘지능’ ‘돈’ ‘외모’ 등의 기준을 가지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구별하며 차별해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런 구별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능력에 따른 구별적인 대우는 정당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구별’과 ‘차별’이 혼돈된다는 데 있다. 능력이나 적성에 따라 다른 일을 하며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능력이나 적성이 그 사람의 존엄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사랑이나 선(善)과 같은 ‘가치들’은 지능이 더 높다거나 돈이 더 많다거나 더 예쁘다는 잣대를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특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꿈에서나 그리던 당신의 이상형이 실제로 당신 앞에 서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꿈인지 생시인지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이상형에게 ‘왜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이상형이 ‘나는 당신이 똑똑하고 돈이 많고 외모가 아름다워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다면 대다수는 ‘이 사람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이상형으로부터 진정으로 듣고 싶은 대답은 ‘아무 이유 없이 단지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일 것이다. 그 이유는, 조건이 붙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인간의 존엄성도 ‘조건 없는 맹목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똑똑하고, 돈이 많고, 예쁘다는 조건에 충족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인간적인 존엄성이 더 많다고 여겨지는 사회라면, 이런 곳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은 가진 것이나 능력과 같은 상대적 상대를 벗어나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픔과 슬픔을 느낄 수 있으며 존중 받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잘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정민 서울시립대 강사

인간의 존엄성이나 사랑과 같은 가치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며 지켜내야만 하는 것들이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옳은 과학’과 ‘옳지 않는 과학’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생학 1회 마지막에서 과학은 날카로운 칼과 같다고 말했다. 좀 더 날카로운 칼을 만드는데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칼을 어떻게 써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