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프랑스 지체 높은 가문의 열다섯 살 딸이 예순 넘은 부자 상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어린 신부는 부모를 여읜 고아였다. 그녀는 결혼식 직후 남편에게 말했다. “낯선 사람이나 아랫사람 앞에서는 저를 심하게 꾸짖지 말고, 제가 저지른 어리석은 일을 매일 밤 침실에서 지적하고 꾸짖으세요. 당신의 가르침과 지시에 따라 저의 행동을 고치고, 전심전력을 다해 당신의 뜻을 받들겠어요.”
감격한 남편은 어린 아내를 교육시키기 위해 직접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책은 600년 전 유럽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가 됐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세세하게 요구한다. “방이나 집을 나설 때 옷의 칼라가 가지런한지 꼼꼼히 살펴라. 길을 걸을 때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눈을 깜빡이지 말라. 시선은 전방 20m 앞의 바닥을 주시하라. 길거리에 서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을 가축의 순종에 비유하기도 한다. “개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눈과 마음은 항상 주인을 향하고 있다. 심지어 주인이 때리고 돌을 던져도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 앞에 엎드려 그를 위로한다.”
저자는 1920~30년대 영국 런던정경대와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지낸 여성 역사학자다. 그는 농부·수녀원장·주부·상인·직물업자 같은 13~15세기 중세의 평범한 여섯 인물을 통해 당대인들의 삶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마르코 폴로처럼 유명한 인물도 다루지만 여섯 주인공 모두 중세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현재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단하지 않는다. 저자는 중세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복원하면서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어린 아내가 갖춰야 할 몸가짐에 대한 책을 꼼꼼히 읽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이 갖는 진정한 가치는 세월을 뛰어넘는 선명한 색채로 중세 여성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데 있다. 중세의 여성은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만의 자리(그것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건만, 역사가들은 지금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냉엄한 학문태도는 뜨겁게 달궈진 민중사나 여성사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80년 전 출간된 책이지만 전혀 낡은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원제 ‘Medieval Peop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