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돈을 ‘주워 본’ 직업군에 고고학자들이 꼽힐 것이다. 특히 무덤을 팔 때 그렇다. 고인의 유족들이 ‘저승길 노잣돈’을 넣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 역시 무덤에서 말고 일반 발굴터에서 돈을 뭉텅이로 ‘줍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돈을 일부러 흘리고 다니는 경우는 없다. 설사 그렇더라도 누군가가 줍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땅에 그냥 묻히는 경우는 드물다.

명지대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는 지난 2004년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일명 ‘피맛길’ 일대 재개발지역 발굴을 했다. 이 중 공방을 겸한 어느 부엌은 불에 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굴됐는데, 여기서 손으로 돌리는 자물쇠 장치만 남은 손금고가 나왔다. 금고에는 일제 강점기에 주조된 일본 동전이 385점 있었다. 총액은 2144전. 1943년에 주조된 동전도 있어서 부엌이 불에 탄 것은 1943년 이후~광복 직전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이 돈은 당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었을까?

박기주 성신여대교수(경제사)는 “일제 강점기, 한국 원과 일본 엔은 1대 1로 교환됐다”며 “100전이 1원(엔)이었으므로 일본 동전 2144전은 21원(엔) 44전이었다”고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중반은 인플레이션이 심했다. 예를 들어 1944년 쇠고기 1근(600g)은 1원 58전이었지만, 1945년에는 9원 32전으로 거의 6배가 뛰었다. 21원 44전으로는 1944년 쇠고기 14근 혹은 쌀 5말 정도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에는 쇠고기 두 근 반, 혹은 쌀 반 말을 살까 말까 했다.

불 타는 집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가지고 나올 만한 돈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중앙문화재연구원도 지난 2004년 3월, 청계천 오간수문(五間水門·청계천 물길이 도성 밖으로 빠질 수 있도록 서울성곽 아래에 다섯 개의 물길을 낸 수문)에서 19세기 초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600닢(개)이 넘는 상평통보 꾸러미를 발굴한 적이 있다.

당시 발굴을 맡았던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상평통보는 수문을 통해 몰래 도성을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쇠창살 아래 흙더미에서 한 꾸러미에 묶인 것처럼 나왔다”며 “출토 상태를 볼 때 물에 쓸려온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오간수문의 ‘개구멍’으로 도성을 드나들다가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됐다”고 했다. 16세기 중엽 임꺽정도 옥에 갇힌 가족들을 구한 뒤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깨고 탈출했다고 전해질 만큼, 오간수문은 불법적으로 한양을 출입할 때 애용되던 통로였다.

발굴된 상평통보를 살핀 한영달(韓榮達) 한국 고전(古錢)연구감정위원회 회장은 “동전의 종류로 볼 때 19세기 초반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19세기 초, 이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손해를 본 것일까? 박기주 교수는 19세기 초, 상평통보 600닢으로 80kg 쌀 한 가마니나 닭 20마리, 혹은 청어 200마리를 각각 살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왕릉을 지키는 종9품 능참봉이 월급으로 쌀 10말과 황두 5말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평통보 600닢은 능참봉 월급의 절반을 훨씬 넘는 액수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