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현 동문밖 주막집.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받아주는 집은 없었다. 그나마 그를 받아준 사람이 주막집 노파였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글로 남겼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에 날리어, 남으로 강진 땅 주막집에 밀려왔네…수심 많으니 밤마다 술만 느는구나.’
그 노파는 당대 학문의 최고봉인 다산에게 물었다. “부모의 은혜는 다 같지만 어머니는 더욱 노고가 많은데, 어머니를 왜 가볍게 여겨,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하는가.” 다산은 옛 책에 따라 추상적으로 답변하고 나서,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다산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깨닫고 두려워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다’고 글을 남겼다.
그 주막집이 26일 옛 모습대로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동문샘 옆)에 복원됐다. 사의재(四宜齋). 동문 밖 노파가 다산이 묵을 수 있도록 내준 집이었다. 그 집은 다산이 강진유배시절 초기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묵직해야 하는 동작’ 등 선비가 마땅히 해야 할 4가지 뜻(四宜之齋)으로 이름 짓고 강진의 학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강진군은 6억4000만원을 들여 주막채와 사의재, 바깥채, 초정(草亭)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군은 또 1950년대 후반 기와로 복원돼 원형을 잃은 다산초당(茶山草堂)도 옛모습으로 다시 세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