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는 황제(黃帝) 헌원(軒轅)과 치우(蚩尤)가 맞서 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황제는 예부터 중국인(漢族)의 조상으로 인정됐지만 치우는 아니었다. 치우가 중국 남부 삼묘(三苗)족의 시조라는 기록들이 있는데, 황제와 치우의 싸움터인 북경 서북쪽 탁록(�鹿) 부근에서 남방으로 이주한 결과로도 해석한다.
‘사기’ 삼가(三家) 주석의 하나인 당(唐)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正義)’에는 ‘구려족의 임금 칭호가 치우이다(九黎君號蚩尤)’라는 공안국(孔安國)의 설명이 실려 있다. 구려족은 중국 산동(山東)·하북(河北)·하남성(河南省)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서 구이(九夷·동이족의 별칭)족과 같은 뜻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은 "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중국의 서욱생(徐旭生) 교수는 1940년대 출간한 '중국 고대사의 전통시대(中國古代史的傳統時代)'에서 치우를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했다.
치우가 한족(漢族)의 조상이 아님은 어의(語義)를 보면 분명해진다. '광아석고(廣雅釋�)'는 "치(蚩)는 난리이다(蚩,�也)"라고 썼으며, '방언(方言)'은 "치는 어그러진 것이다(蚩,悖也)"라고 썼고, 심지어 "치우의 우(尤)는 유우(由尤)인데, 뱃속의 벌레이다(腹中之�)"라는 기록까지 있다. 이는 자신들과 싸웠던 이민족들에 대한 한족(漢族) 특유의 비칭(卑稱)이 분명하다.
홍콩의 친중국계 ‘문회보(文�報)’가 ‘중국 민족의 조상 중 한 명인 치우를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하는 중국 기류를 전하는 기사를 최근 보도했다. 자기 조상을 ‘뱃속의 벌레’라고 표현해 왔다는 자백(?)인지 몰라도 중국은 동북·서남공정의 이론적 틀을 만들기 위해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편입시키는 환부역조(換父易祖)를 진행해 왔다. 치우 문제를 시작으로 한·중 역사논쟁이 고조선·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저질스런 차원에서 중국 특유의 역사왜곡 사실들을 밝혀내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