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이제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왔다. 심하게 말하면 몇 년 사이 와인 때문에 난리다. 비즈니스 식사 때 와인은 보통이다. 골프장 그늘집에서도 와인 세일을 하고, 심지어 맞선 자리에서도 앉으면 와인 얘기다. 너도나도 한마디씩 전문가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 변질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와인은 대부분 비행기 타고 온 와인이 아니라 배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수입하는 포도주는 90%가 배를 타고 오고, 10%만 비행기를 탄다. 작년에 비행기 탄 와인은 1944t, 배 탄 와인은 1만9920t이었다.
와인은 온도 변화와 진동, 광선 등에 민감한 술이다. 민감하기 때문에 문화적 대접을 받기도 하고 값도 비싸다. 우리나라엔 프랑스, 칠레, 미국, 이탈리아, 호주, 스페인, 독일 순으로 와인이 들어온다. 이 중 열에 아홉 병이 해상운송이고, 그 중 대부분이 적도를 지나온다. 불가피하게 보름에서 두 달 동안 파도 위에 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와인 화물선 중에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와인을 수면보다 낮은 밑바닥에 싣고 그 위에 다른 화물을 얹기도 한다. 컨테이너의 빈 공간에 에어백을 넣어 와인상자를 고정시키고 롤링을 줄이는 방법도 쓴다. 아예 여름철엔 수입을 중단하거나 일부는 냉장 컨테이너를 쓸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적도를 그대로 통과하면서 장기간 운송되기 때문에 온도변화와 진동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비자가 선택하는 와인이 배를 타고 왔는지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표시하고 있다. 배 타고 온 와인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냉장 수송을 했는지의 여부를 표시하기도 한다. 냉장 수송이 대략 3배쯤 비싸기 때문이다.
문화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국민들이 보다 민감한 혀와 코를 갖는 일이기도 하다. 요즘엔 아침에 이메일 박스를 열기 무섭게 서너 통의 ‘와인 초청장’이 들어 있다. 유명한 호텔에서 와인 시음회를 여니 와달라는 내용이다. 곳곳에서 와인 벼룩시장도 열리고, 때론 절반 이하 가격의 세일도 있다. 그러나 어디서고 운송 수단을 밝힌 라벨은 못 봤다.
와인을 소재로 한 일본 만화책 ‘신의 물방울’은 2005년 가을 첫선을 보인 시리즈물인데 입소문만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됐고, 와인 전문서적, 와인 관련 에세이가 하루 걸러 한 권씩 나오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조차 ‘디캔팅’이란 말을 자연스레 입에 올릴 정도가 됐지만, 정작 와인 수입의 운송 수단에 대해 언급한 책은 보지 못했다.
한국의 와인 소비량은 2000년 이후 연평균 48%씩 늘어나고 있다. 와인동호회, 와인닷컴, 와인바, 와인전문가게, 와인아카데미도 해마다 수백 개씩 불어나고 있다. 때맞춰 와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식도 갈수록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보졸레 시음이 최고의 와인 파티라도 되는 것처럼 덜렁대던 건 옛날 일이다. 와인이 무조건 심장에 좋다느니, 와인을 많이 마시면 코가 빨개진다느니 하는, ‘미심쩍은’ 뉴스들도 근년에는 거의 없어졌다.
얼마 전만 해도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와인 리스트에 산지(産地) 표시만 있을 뿐 연도(年度) 표시가 없었다. 와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빈티지가 없다는 것은 사실상 가격이 수십 배까지 차이가 날 수 있었는데도 우리는 ‘너그럽고 무식하게’ 그냥 마셨다는 뜻이다. 지금은 절대 아니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라도 테이블에 오른 와인이 비행기 타고 왔는지, 배 타고 왔는지 따져야 할 때다. 모든 문화 상품이 그렇다. 소비자의 눈과 귀, 코와 혀가 민감해야 서비스도 가격도 제자리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