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번역도서 천국”. 이틀 전 조선일보는 뉴욕타임스 기사를 인용, 2004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발행된 책 중 번역서 비율이 29%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지난 1994년에 번역서 비율이 15% 정도였으니 10년 사이에 두 배나 성장한 셈이다. 문제는 번역물의 양적 비중보다도 훨씬 큰 시장 지배력에 있다. 최근 국내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국산 저작물이 절반에도 못 미친다. 또 2005년 기준 연간 베스트셀러 30위권 도서 가운데 외국 번역서가 16종으로 절반을 넘었다. 반면, 같은 해 일본의 경우 번역서 비율은 8% 수준이며, 연간 판매량 상위 30위권 목록에 번역서는 단 2종만이 올랐다.
일반 단행본 가운데 외국 번역도서의 출판시장 지배율이 50% 이상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야말로 미국, 일본, 유럽 3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등 우리에게 저작권을 수출하는 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게 번역서가 넘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글로벌 환경에서 국내 출판 콘텐트의 재생산 구조가 허약하고 시장 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와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학교교육 등으로 저작자층이 얄팍한 마당에 우수한 콘텐트가 생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에 가깝다. 독자들이 외국 브랜드에 맛들인 결과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한 대다수 출판사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과 기회비용이 소요되는 국내 저작물보다는 외국에서 상품성이 검증된 책을 단기간에 번역하여 내놓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사업 여건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저작권 수입 중개 시스템과 과당 경쟁에 의한 최고 수준의 로열티를 지불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문학까지 일본에 자리를 내준 한국문화의 열패감을 어떻게 만회할 것인가.
그런 한편, 2년 전 영미문학회에서 검토한 572종의 번역 문학서 중 신뢰도가 매우 높다고 평가한 책은 단 6종에 불과했다. 이처럼 잘못된 번역과 날림번역이 심각한 수준이다. 학자들은 연구업적 평점이 낮은 번역 작업을 기피한다. 번역서는 많지만 몇몇 나라의 상업적인 책에 치중해 있고, 번역출판의 속도는 세계 최고이지만 번역의 질은 담보되지 않으며, 대리번역(이중번역)이 빈번하고 한 권의 원서를 여러 권으로 분책해 독자의 빈축을 사는 것이 번역출판의 현주소이다.
하지만 번역도서가 넘치는 현상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국의 다양한 문화와 지식을 가장 손쉽고 저렴하게 수입하여 우리말로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직까지 번역되지 못한 수많은 고전과 명작들이 상업성에 밀려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뜻있는 학자와 출판사들이 고전·명저 번역 지원정책의 부족을 한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종합적인 해결책이 설계돼야 한다. 미국과는 100대1, 일본과는 40대1이 넘는 출판 저작권의 무역역조를 방치한 채 지식기반 사회의 문화강국을 꿈꾸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국내 저작 기반의 공고화, 획기적인 출판 콘텐트 수출 지원 정책, 국내외 번역자 양성체계 정립 및 번역학 발전이 선행돼야 한다. 프랑스는 자국 출판물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전문기구(BIEF·프랑스출판국제사무소)를 이미 30여 년 전에 설치하고 문화 수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장기간 민·관이 지혜를 모아 만들어낸 문화관광부의 ‘출판지식산업 육성방안’을 시급히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다. 근년에 한국도서의 아시아권 저작권 수출이 급증하는 것도 우리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준다. 문화의 삼투막인 출판은 언어권 시장을 번역으로 연계하는 언어문자의 네트워크이다. 대한민국이 진정 지식강국으로 나아가려면 그 성장판 역할을 하는 출판과 번역문화의 기반부터 새롭게 곧추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