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지면에 비친 한국 가족제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1934년 전국 중등학교 학생 9933 가족 대상 조사에 따르면 가족성원은 7.8명(한국민족문화사전). 외형적으로는 대가족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1920년 3월 5일 이 땅에 근대 언론이 태동하면서 옛 가족제도가 안고 있는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87년 지면에는 2007년 ‘한 자녀 시대’가 올 때까지 한국 가족제도 변화상이 고스란히 적혀져 있다.
◆1920~1930년대: 축첩(蓄妾), 조혼(早婚) 그리고 이혼(離婚)
"…축첩세(蓄妾稅)를 단연코 실행하여 주시오. 본인은 하기(下記) 이유로 복망(伏望)하나이다. 단 축첩세의 반대자가 여하히 다(多)할지라도 불청(不聽)하옵소서. 첩(妾)의 해(害):一 재산 탕진, 二 가정 불화, 三 건강상 유해, 四 사업에 방해, 五 윤기(倫氣)를 난잡케 하는 일. 시내 모 귀족의 손(孫)" 1924년 10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기사 제목은 '경성 부윤에게 온 원서의 내용, 다섯 가지 축첩의 폐해 들어'.
당시 곪고 있던 가족 문제가 조선일보 창간과 함께 만천하에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가족문제는 첩제도와 어린아이들의 혼인이었다.
얼마나 문제였으면, 창간된 지 다섯 달이 지나기도 전인 1920년 7월 22일자 조선일보는 '蓄妾(축첩)의 弊風(폐풍)을 改(개)하라'는 제목으로 "도덕을 배양코저 함에 서둘러 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나 (축첩폐지는) 절박하고 필요한 문제로다"라고 일갈했다. 1면 머리기사였다. 그만큼 첩문제는 심각했다.
1923년 8월 23일자는 '賣妾開業(매첩개업)' 제목으로 "이리의 변모(邊)가 정을 통하고 재미있게 지내오던 기생을 첩으로 들인 뒤 술집에 500원에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병원을 차렸다"고 보도했다. 1932년 2월 10일자 기사는 이러했다. "…결혼한 지 사흘 만에 이혼하고… 저의 어머니도 속아서 첩으로 가서 고통을 받아 왔는데 제가 또 첩으로 속아 갔습니다. 동경에서 공부를 해서 약하나마 제 힘으로 조선 남자들이 아내를 둘셋씩 데리고 사는 풍속을 없애려 합니다.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平壤一女"(34.2.7. '어찌하리까' 코너)
조혼(早婚) 풍습 또한 조선일보가 폐지를 주장한 악습이었다. 창간 석 달 후인 1920년 6월 4일 '미성년자에게 조혼을 금하라'는 사설은 "인종이 退劣(퇴열)하고 남녀가 夭札(요찰·일찍 죽음)하고 가정이 不睦(불목)해지는" 폐해를 지적하며 조혼제 폐지를 주장했다.
'조혼과 미신에 희생된 13세 소녀'(24.11.23) 기사는 "12살에 시집간 김성녀는 시부와 시형이 죽자 '네 살(煞)로 그리 되었다'며 가족들이 구타하고 불로 지져대 무참히 황천의 객이 되어 버렸다"고 보도했다.
'남편이 범처럼 무서워 죽이고자 양잿물을 먹인 17세 류소제'(25.1.17), '신랑은 7세, 신부는 5세'(39.1.30), '소녀의 범죄 동기는 조혼 폐습에서 기인'(38.5.12) 등 조혼문제는 40년대까지 한국 가족제도의 큰 멍울이었다. 그래서 '조혼하게 되면 큰 인물이 못됩니다. 일찍 늙고 병들어 시듭니다'는 어린이 대상 기사(1931.9.12), '전국 중등학교장회, 약혼·기혼 남녀 학생 입학 거절 결정'(33.9.12) 기사도 나왔다.
이혼(離婚)도 봇물처럼 터지면서 '웅덩이처럼 고여 있던' 가족제도에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경성부청에서 때때로 열리는 이혼 신고 비극의 막'(21.1.18) 기사는 "월 평균 열 번씩은 열리는 이혼 신고가 사회의 죄인가 시대의 죄인가"라고 썼다. '평양에서 이혼토론회 개최'(31.5.1) '이혼의 선봉은 여성?'(38.1.27) 기사는 "여자들이 분수에 지나치는 허영심에 떠서 방종한 생활을 하려 하는 데 원인이 더 많은 것 같이 보인다"고 풀이했다.
◆광복~1950년대: 많이 낳아 잘 기르자
징용당했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북한에서 내려온 인구들이 유입되면서 한국 인구는 급증했다. '인구 과잉? 팽창 일로의 남조선 인구 동태'(47.11.19) '귀환 200만, 철퇴 90만'(47.9.24) 등 기사가 이를 말해준다.
전쟁 와중인 1951년 6월 2일부터 한 달 동안 조선일보에는 전쟁 고아가 된 아이들 소재지를 알려주는 기획기사가 게재됐다. '열 두 남매를 곱게 곱게 양육'(58.12.27) '吉兆! 뻐스 안의 순산'(61.11.30) 등 한국전쟁 후 60년대 초까지는 다산(多産), 노천 순산 기사가 줄을 이었다.
◆1960년대~1970년대: 가족제도의 변화-산아 제한의 시대
1958년 12월 17일자 '색연필': "…보건사회부 부녀국에서는 부쩍 산아 제한운동에 열을 올려… '아이를 많이 낳으니까 윤락 여성도 생기고 깡패도 생기는 것이니'… 기막힌 이유."
경제 개발 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 가족 기사의 화두는 '산아 제한'이었다. '산아 제한 기치 들고 가족계획협회 창립'(61.3.31) '합법화된 임신 중절'(65.10.24), '인구 증가율 1%로… 86년까지 4천만'(68.10.8)….
초기 목표 자녀 수는 '3년 터울에 4명 정도'(61.11.16). 그러다 70년대 말 축구선수 차범근씨 가족이 모델로 등장한 캠페인 광고는 '하나만 더 낳고 그만둘 겁니다'였다(딸 하나였던 차범근씨 부부는 훗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그리고 '한 자녀 낳기'로 과격하게 수정됐다.(83.6.29)
후유증은 크다. '백말띠해 여아 출산율 감소'(66.12.30) '여전한 아들 우위, 전국 부인 53%가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겠다… 첩(妾)도 허용'(72.5.20) 등 기사는 지금 한국 사회가 맞고 있는 저출산, 성비 불균형시대를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