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고 시종일관 겸손을 보였지만, 김혜수의 표정과 말투는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유부녀들의 욕망을 날렵하게 그린 코미디 ‘바람피기 좋은 날’(8일 개봉)에서 그녀는 열살 어린 대학생과 바람나는 30대 주부. 여전히 쾌활하고 씩씩한 캐릭터지만, 예전 그녀의 코미디에서 부담스러웠던 과잉이나 과장의 느낌은 거의 찾기 힘들다. 연기생활 21년째를 맞은 이 여배우에게 궁금했던 건, 바로 그 대목. 몰래 숨겨놓았던 재능이라도 되찾은 걸까.
대중은 ‘타짜’의 흥행성공 이후 ‘김혜수의 재발견’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녀 자신이 가르는 분기점은 ‘연기를 접을까 생각하다 다시 돌아온’ 2000년이다. “그 이전까지는 감독님이나 동료 배우 등 재능 있는 사람들의 창조적 에너지로부터 받는 자극에만 만족하며 살았다”는 것. 한 발 더 솔직해 지자면 “스스로의 재능 부족을 처절히 인정한 뒤의 자기합리화”였다.
당시 김혜수는 '배우'라기보다 단순한 '스타'였다. "그냥 방송과 영화의 트렌드에 부응하던 연기자였을 뿐"이라는 게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평가. 그녀는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그냥 코미디, 극장에서 개봉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에로 영화에 불과했다"면서 "이 장르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역할이 그렇게 제한적이었다는 뜻"이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2000년 이후의 성취에 대해 김혜수는 "상호간의 노력"이란 표현을 썼다. 배우 개인의 지속적인 도전과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준 감독들. 한 때 연기를 포기할까도 고민했던 그녀는 '신라의 달밤'(2001)을 시작으로 'YMCA 야구단' '쓰리' '얼굴 없는 미녀' '분홍신'에 도전했다. "흥행 성공 때문에 '타짜'만 기억하시는 관객들이 많겠지만, 사실 제 새로운 노력의 기원은 그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 하나. 열다섯 나이로 데뷔하던 초창기부터 김혜수는 한국 남성관객의 성적판타지를 만족시켜주는 아이콘 중 한 명이었다. 막힘 없는 달변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분석·평가하던 이 여배우가 잠시 멈칫했던 것도 이 대목이다. 하지만 곧 예의 차분함을 되찾고는 "배우라는 직업은 남자건 여자건 태생적으로 그 판타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고, 또 만족시켜줘야 하지 않느냐"며 활짝 웃었다. 물론 "지나치게 노출만 강조하는 기사나 사진을 실은 매스컴을 보면 솔직히 불편한 적도 있다"는 한 마디도 빼놓지는 않았지만.
"잘나신 감독님들이 찾아주질 않는다"던 예전의 푸념도 이제는 옛일이다.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명이 된 그녀는 이달 말 개봉하는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家'에서 무협지를 쓰는 여성 작가로 관객들을 만나고, 지금은 김진성 감독의 '열한 번 째 엄마'를 찍고 있다. 인생 막바지에서 한 아이를 만나 진짜 '엄마'가 되는 역할이다. 그 역할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뜬금없이 "아이를 낳으면 시골에서 살게 하고 싶다"고 했다. 까닭을 물었더니 최동훈 감독과 백윤식 유해진 조승우 등 동료 배우들과 함께 '타짜'를 찍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물론 타고난 재능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점이 '시골' 출신이라는 걸 발견했다는 것.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고, 더구나 너무나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탓에 삶에 대한 경험도 일천한 김혜수의 요즘 콤플렉스다. 그녀는 "기를 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자연의 원체험 같은 게 있더라"며 부러워했다. 그들이 가진 재능의 크기를 설명하다가 테이블 갓을 올려 칠 정도로 흥분했던 이 30대 후반의 여배우가 문득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 작년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던 김혜수씨가 새영화 '바람피기 좋은날'로 우리들 앞에 다시 섰다. /조선일보 정경열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