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이목희 전략기획위원장은 며칠 전 여당 내 개혁파(진보파)와 보수파가 갈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갤럽의 17일 여론조사에서 호남지역 한나라당 지지율이 20.6%로 나타났다. 과거 4~5%에 불과하던 지지율이었다. 한나라당 대선주자 3명의 호남지역 지지율을 합치면 50%에 육박한다.
아직 초반전이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올해 대선의 특징 중 주목되는 것은 이 두 가지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상황도 엄연한 하나의 현상이다.
1987년 6·29 선언 후 ‘민주화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주화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진로를 막아선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지역체제로 굳어버린 정치’다.
여론조사에서 영남 지역은 늘 보수적인 답변이 우세하고 호남 지역에선 진보적인 응답이 많이 나온다. 보수로부터 아무 득 본 것이 없을 영남 출신까지 정치 문제에서는 까닭 모를 보수적 입장을 갖고 있고, 모든 생활을 보수적으로 하는 호남 출신이 정치 문제에서만은 진보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양쪽 지역 출신 정치인들 간의 오랜 싸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어느새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철옹성이 돼 버렸다. ‘영남이면 보수고 호남이면 진보’라는 이 구조가 우리 정치와 사회에 끼치고 있는 폐해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중요한 국가적 문제들이 지역이란 소용돌이를 거쳐서 왜곡되는 것이 한국 정치의 시스템처럼 돼버렸다.
갤럽의 지난 17일 여론조사에서 ‘남북정상회담이 북핵 문제 해결 등 남북관계 정상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호남에선 ‘기여한다’는 응답이 61%, 기여 못 한다는 응답이 31%였다. 영남 지역의 응답은 정확히 그 정반대였다. 갤럽의 2월 여론조사에서 호남지역에선 국가보안법 폐지 의견이 더 많이 나왔지만, 영남지역에선 국보법 폐지보다 존속 의견이 3배 가까이 더 많았다. 작년 9월 여론조사에서 전시작전권 단독 행사에 대해 호남 지역의 찬성률(37%)은 영남 지역의 찬성률보다 훨씬 높았다. 한국리서치의 작년 10월 조사에서 영남 지역에선 북한 핵실험 이후 대북 포용정책을 전면 폐기하라는 의견이 그대로 유지하라는 의견보다 많았지만, 호남 지역에선 그대로 유지하라는 의견이 훨씬 더 높았다.
햇볕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다. 한국리서치의 작년 10월 조사에서 부산·경남 지역에선 ‘분배보다 성장’이란 의견인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호남지역에선 ‘성장보다 분배’라는 의견이 훨씬 더 많았다. 양쪽 지역 소득분배율에 별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온다.
이런 구조 아래에서 국가 정책은 선택과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고 지는 싸움이 돼버린다. 정상적인 논쟁도 불가능하다. 나쁜 정책도 지역에 따라 찬성이 많이 나오고, 좋은 정책도 지역에 따라 반대가 많이 나오게 돼 있는 구조 속에서 정치가 제대로 정책을 만들 수 없다.
열린우리당 김종률 의원은 최근 여당 의원들에게 자신의 이념의 본적(本籍)을 따라 헤어지자고 했다.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도 언젠가 그렇게 돼야 한다. 같은 당 이목희 위원장은 여당 내 보수파들은 결국 민주당과 합쳐져 ‘호남보수당’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사자들이 지금은 싫어할 말이지만 호남보수당이 나오고 영남진보당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영남 보수와 호남 보수가 합쳐지고 호남 진보는 영남 진보와 합쳐져서 동·서가 좌·우로 바뀌어야 한다. ‘지역’을 졸업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정치 불안은 영원히 해소될 수 없다. 이유 없는 국민 간의 불화(不和)도 해소될 수 없다. 한반도 급변의 순간에 국력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멀다. 비도 오고 눈도 올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길을 떠나야 한다. 어느 학자가 다른 뜻으로 쓴 말이지만, 그 길의 끝이 바로 대한민국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