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 수도원의 식당 벽면에 그려진 벽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가 밀라노에 거주하던 마지막 무렵인 1494년에서 1497년 사이에 무어인 로드비코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일생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인 그의 12사도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 사도중의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이전의 같은 소재의 그림들과는 구성방식이나 표현방식에 있어서 변화를 추구하였다.

전통적인 구성방식에서는 배반자인 유다가 눈에 띄게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반대편에 따로 앉아있으나 레오나르도는 모든 인물들을 한쪽 평면에 위치시키고 세 명씩 무리를 지어 구분되도록 하였고, 정확한 원근법을 이용하고 실내의 배경과 멀리 보이는 창문을 통해 늦은 오후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햇빛이 들어오게 하여 인물들을 뒤로 깊이 물러나 보이도록 하였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담담한 심정을 표출하듯 그려졌으나 그리스도의 선언을 들은 사도들은 얼굴과 몸동작을 통해서 분노, 체념, 고통, 충격, 당황, 공포 등의 모든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표정과 행동으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는 인상학을 연구했던 레오나르도는 하나의 사실에 제 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12사도들을 마치 연극무대의 배우들을 보는 듯 표현하였다.

중앙의 그리스도 오른 쪽의 배반자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과 배신의 대가로 받은 30개의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고, 그 뒤에 성미 급한 베드로는 단검을 들고 유다를 막아선 채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그 옆에는 미소년인 요한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왼쪽의 양팔을 벌려 충격에 휩싸인 야고보와 그 뒤에 집게손가락을 세워 위를 가리키고 있는 토마는 의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옆의 필립보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옆의 또 다른 무리들인 마태오, 유대, 맨 마지막에 앉은 시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상황에서 애써 냉정을 찾으려고 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은 이후 179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들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벽화가 있는 수도원을 마구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습기와 수많은 덧칠로 인한 훼손이 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폭격으로 식당 이 무너졌는데 수도원장이 벽화 위에 천을 덮어두어 세상에서 이 벽화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500년 동안 쌓여있던 먼지와 곰팡이를 제거하고 보수작업을 통해 화려한 채색과 선명한 인물의 묘사가 돋보이는 지금의 상태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2003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800만부이상 팔리고 영화까지 제작된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는 이 그림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부인으로 그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그리스도교를 둘러싼 금기시 된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과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과 기독교인들로부터 교회의 역사를 왜곡하였다는 비판을 받으며 ‘다빈치 코드 뒤집기’ ‘다빈치 코드의 사기극’ 등 현직 종교인들이 낸 책도 10여권 출판되었다. 안티 사이트 등까지 만들어지고 ‘책과 영화 안보기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며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초기역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재해석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로는 그리스도가 결혼했다거나 마리아가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못했으나 이런 가설이 중세에 폭넓게 신봉되었고 수많은 예술작품과 문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정말로 이런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해결하라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