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시 동북쪽에는 명봉산(鳴鳳山)이 있다. 앵무산(鸚鵡山)이라고도 하는 이 산자락에는 도교 사원인 금전(金殿)이 있다. 금전에서 효종이 생각나는 것은 오삼계(吳三桂) 때문이다. 금전에는 오삼계가 사용했다는 칠성보검(七星寶劍)과 그가 250t의 동을 사용해 건축한 중국 최대의 동전(銅殿)이 있다.

북벌 군주 효종은 재위 10년(1659) 송시열과 독대(獨對)해 북벌에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효종은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라면서 '정예 포병(砲兵) 10만을 기른 다음 기회를 봐서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토로했다. 효종은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도 했다. 효종은 독대 한 달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만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에 실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오삼계가 주도한 '삼번(三藩)의 난'이 그것이다.

오삼계는 청나라와 맞서 싸우던 명나라의 마지막 주력군 사령관이었으나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고, 의종(毅宗)이 자살하자 황제의 원수를 갚는다며 되레 청나라와 손잡고 이자성을 공격했다. 오삼계의 황제 복수 운운이 허위라는 것은 1662년 신종(神宗)의 아들인 계왕(桂王)을 곤명에서 목을 벤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로써 청나라의 신임을 얻은 오삼계는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져 운남과 귀주(貴州)를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강희제가 철번령(撤藩令)을 내리자 이에 반발해 봉기했고,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가 동조해 '삼번의 난'으로 확대된다. 이때 백호(白湖) 윤휴(尹?)는 밀소(密疏·비밀 상소)를 올려 하늘에서 내려준 기회라며 북벌을 주장했다. 효종이 생존했다면 서슴없이 북벌했을 것이지만 이미 문약화(文弱化)된 조선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구호로서 족한 것이었다. 이 머나먼 곤명시 금전에서 난무하는 이념만큼이나 문약화된 조국의 현실을 우려하며 효종을 되새기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