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7 춘계-하계 기성복 패션박람회 ‘후즈넥스트(Who’s Next)’에 특이한 의상이 선을 보였다. 늘씬한 모델들이 입고 있는 하늘하늘한 옷에는 붓글씨로 그려놓은 한글 자모가 박혀 있었다. 백의(白衣)에 검은 글씨로 굵게 적어내린 ㄱ, ㄴ, ㄷ, ㄹ 그리고 한글 자모를 응용한 추상적인 그림들…. 바닥에도 굵은 붓으로 그린 듯한 거친 문양이 그려져 있다. 캣츠워크(모델들의 걸음걸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관중석에서는 호기심 가득한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호기심과 박수, 사흘 동안 이어졌다. ‘동양적이면서도 모던한 미학’, ‘기하학적인 조형미와 패션의 조화’라는 평이 잇달았다. 한글을 서구 문화의 중심가 파리에 당당하게 선보인 사람,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이다.
"자기 글자가 있는 민족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한글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이씨는 사업이 어느 정도 기반이 닦이면서 "어떡하면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과 접목시킬 것인가"라는 고민을 안게 됐다. 서울과 파리를 분주하게 오가며 작품활동을 벌이던 지난 2월, 파리에서 열린 한 패션쇼에 한글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소리꾼 장사익씨, 미술가 임옥상씨가 보내준 편지에서 필체들을 그대로 인용해 옷을 만든 것. 파격적인 전환이었다.
그런데 세계는 한글을 알아봤다. 일본 혹은 중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아시아에 새로운 디자인이 나타난 것이다. 평단의 호응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 큰 호응을 밑천으로 내친 김에 이씨는 이번 춘계 하계 패션쇼에 한층 더 한국적인 디자인을 들고 나타났다. 서예가 국당 조성주씨의 필체를 의상에 담았다. 하늘로 날아간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도 옷에 담았다. 붓의 터치와 선의 아름다움을 접목한 추상적인 작품들도 내놨다.
지난 7월에는 서울 평창동의 한 갤러리에서 한글을 주제로 한 작품전도 열었다. 지난 2월 파리 패션쇼에 출품했던 작품 20여 점을 벽에 걸어놓았다. 전시회 제목은 '한글, 달빛 위를 걷다 - 이상봉과 친구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장사익씨의 글씨가 물처럼 자유롭게 흐른다면 임옥상씨의 글씨에서는 불 같은 열정을 느낄 수 있어요." 한글에서 물이 보이고 한글에서 불이 보인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됐고 한편으로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글에 반쯤 미쳐 인생을 건 디자이너가 지금 세상을 향해 뛴다. 세상 무관심 속에 외래어 홍수에 묻혀가는 한글, 그가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