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35년(1709) 8월 61세의 정제두(鄭齊斗)는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연보(年譜)'에는 "장손(長孫)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하여 선묘(先墓) 가까운 곳으로 살고자 이사했다"라고 쓰고 있지만, 내막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는 숙종 18년(1692) 스승인 명재(明齋) 윤증(尹拯)에게 보낸 편지(答尹明齋書)에서 "왕씨(王氏)의 학문에 대해서는 구구하나마 조그만 소견이 없지 아니하여 그대로 매몰시킬 수 없어 간간이 친구들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나 누가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왕씨의 학문'이란 바로 왕양명(王陽明)의 학문, 곧 양명학(陽明學)을 말한다. 백호(白湖) 윤휴(尹?)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와 다르게 유교 경전을 해석했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 '주자학 유일사상'의 나라에서 양명학 연구는 곧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였다.

강화도 이주 후인 숙종 41년(1702) 정제두는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른바 왕씨의 설도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정주(程朱)와는 같지 않지만 그 취지는 본래 정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고 비로소 양명학을 주자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울이나 경기에서는 집권당 노론(老論)의 주자학 유일사상 압제를 피할 수 없기에 몸을 스스로 섬에 고립시키는 대신 정신의 자유를 얻고, 유일사상 체제의 폐해에 대한 대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강화학파(江華學派)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저자 이긍익(李肯翊)과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 이건창(李建昌), 집권 노론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자 애국계몽운동에 나선 김택영(金澤榮), 상해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독립운동가 정인보(鄭寅普)는 모두 강화학파의 맥을 이은 인물들이다. 닫힌 사회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강화로 유배 간 한 인문학자가 남긴 족적은 이렇게 거대했다.

이런 강화학파의 맥마저 잇지 못한 사회에서 새삼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남세스럽다. 더구나 인문학 위기의 해결책이 국가의 정책·예산 지원이라는 비(非)인문학적 해법으로 모아지는 것 자체가 인문학이 왜 위기인지 문제의 본질을 말해준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