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사이먼 래틀은 최근 독일 평단으로부터 궁지에 몰렸다. 비평가들은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이 쌓아온 독일 관현악의 전통을 래틀이 무시하고 현대 음악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래틀은 "중요한 건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질(質)"이라며 반박했지만, 심기가 불편했던 건 사실. 래틀이 올 여름 프랑스 남부 휴양 도시 액상 프로방스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독일 오페라의 최고봉인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반지)를 매년 1편씩, 4년에 걸쳐 완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래틀이 처음으로 지휘하는 '반지'에 세계 음악 팬의 이목이 집중됐고, 7월 2일부터 시작한 '반지'의 1부 '라인의 황금'은 최고 290유로(35만원)에 이르는 가격에도 팬들이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목격됐다.
막상 막이 오르자 눈 앞에 펼쳐진 무대 장치는 단 3개뿐. 의자와 계단, 벽 한복판에 설치된 창틀이 볼거리의 전부였다. 중요한 건 물량 공세가 아니라 아이디어라는 듯, 연출가 스테판 브라운쉬바이크는 미니멀리즘에 가까울 정도로 무대를 단순화시켰다. 대신 북유럽의 신화적 요소를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각색한 아이디어들이 2시간 40여분 내내 튀어나왔다. 난쟁이 니벨룽족(族)을 장악하고 있는 알베리히(데일 뒤싱)는 짙은 갈색 군복 차림으로 등장, 마치 히틀러를 연상시켰다. 하긴 절대 권력을 바탕으로 지하 세계의 인민을 괴롭히며 세계 정복을 꿈꾸는 건 히틀러도, 알베리히도 마찬가지다.
래틀의 베를린 필은 바그너 특유의 과장에 빠지지 않고, 명징(明澄)한 사운드를 시종 유지했다. 끊임 없이 꿈틀거리는 현(絃)과 거인족이 등장할 때 특유의 묵직한 금관은 '이념으로서의 바그너'가 아니라 '소리 그 자체로서의 바그너'를 체현하는 듯했다.
첫 공연이 끝난 뒤 래틀은 이례적으로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연주한 단원들을 전부 무대 위로 불러냈고, 자정을 넘겼지만 단원들의 등장에 기립 박수를 보내는 청중은 한없이 늘어났다. 포도밭과 화가 세잔의 도시는 이렇듯 한여름의 바그너로 여물어갔다.
입력 2006.07.0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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