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영화감독협회 임원식 이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감독님이 돌아가셨다고, 장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주도 우리 별장에서 감독님 오시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철쭉들은 어떡하라고, 그렇게 쉽게 가셨습니까.
작년 12월 15일, 날짜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춘사영화제 때문에 제주도를 찾은 감독님은 신영박물관에서 저와 만나 "신 회장 집에서 좀 쉬고 싶다"고 그러셨죠. 아마 한 40년쯤 됐을 겁니다. 감독님이 연출하고 제가 주연한 '마적'을 제주도에서 찍었잖습니까. 그때 이 아름다운 섬에 매혹된 저는 별장과 영화박물관을 지었고, 감독님도 그 집을 좋아했었죠. 이번에도 허물없이 나에게 "보따리 싸가지고 갈 테니 집 좀 쓰자"고 얘기하셔서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혼자 기분 좋아했는지, 감독님은 모를 겁니다. 꽃 피는 봄에 오겠다고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수리와 청소를 마치고 기다렸는데, 감독님은 소식이 없고 웬 청천벽력입니까.
감독님과 저는 두 살 차이인 데다, 같은 평산 신씨였지만, 저는 늘 형님 대신 감독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존경했기 때문이지요. 아마 최(최은희) 여사를 제외하면 제가 감독님의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일 겁니다.
감독님 기억납니까. 1962년 제1 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 감독님이 연출하고, 제가 주연한 우리 작품 '연산군'이 큰 상을 휩쓸었던 사실을.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이 다 우리 차지였죠. 자랑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 작품 찍느라고 인왕산에 가서 촬영하는데, 감독님이 장소 헌팅 하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죠. NG를 스무 번이나 부르고도 좋은 화면 찍겠다고 포기하지 않던 감독님의 열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신필름이 부도직전까지 몰려 빚쟁이들이 촬영 현장까지 쫓아다녔을 때도, 감독님은 영화에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달 전에도 이어령 전 장관과 몇 분이 함께 우리 점심을 했잖아요. 그 때 웃으면서 그러셨죠. "더 늦기 전에 우리 작품 하나 함께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빨리 건강이나 회복하시라고요. 제주도에서 감독님은 '징기스칸' 구상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셨죠. 10년 가까이 준비하던 필생의 프로젝트 말입니다. 이승에서는 불가능했지만, 하늘에서라도 그 작품 꼭 완성시키시오, 감독님. 부디, 명복을 빕니다.
(구술=신영균·신영예술문화재단 이사장)
입력 2006.04.1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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