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세기 전반기,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雁洞·기러기동네)고분에 묻힌 이는 누구였을까? 강력한 독립 소국(小國)의 지배자였을까, 아니면 왜인(倭人)인데 백제에서 '용병'이나 '관료'로 활동했던 인물일까?
'무령왕릉 이후 백제지역 최고 고분'(최병현 한국고고학회장) '고대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유적'(권오영 한신대교수) 등의 평가를 받는 안동고분의 '실체'를 둘러싸고 고고학계가 논란에 휩싸였다.
◆독특한 무덤 생김새=전남대박물관(관장 임영진)은 24일 안동고분에 대한 중간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 고분은 직경 34m, 높이 6m의 원형 무덤이다. 봉토 정상부에 돌로 쌓은 무덤방(현실·玄室)을 만들었다. 길이 320㎝, 너비는 무덤방 출입구가 딸린 서쪽이 130㎝, 동쪽이 150㎝인 사다리꼴이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청동거울, 철제 갑옷 외에도 둥근고리 큰 칼 3점, 쇠투겁창 2점, 철제 투구, 철 화살촉 등이 발굴됐다. 금동판을 도려내어서(투조·透彫) 만든 금동관은 충남 공주 수촌리, 충남 서산 부장리 등에서 나온 백제 금동관과 제작 방식이 같다. 청동거울에는 자손의 번창을 기원한다는 '長宜子孫'(장의자손)이라는 글자를 썼다. 거울에는 이 밖에도 8자가 더 적혀 있지만 아직 판독되지 않았다. 임영진 교수는 "5세기 초반 무덤으로 본다"고 했다.
◆무덤 주인공은 누구?=최대 쟁점이다. 학계 다수설은 백제의 '간접 지배'를 받는 고흥지역 수장(首長)이다. 근거는 전형적인 백제 금동관·금동신발이 발굴됐다는 점이다. 서기 4세기 한반도 최고 강국을 구가했던 백제는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5세기 고구려의 위세에 눌리면서 한반도 남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충청과 전라지역 지배자를 정치적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 최고 위세품(威勢品)을 '대가성'으로 줬다는 것. 충남이나 전남·북에서 나온 금동관이 모두 5세기 때 것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흥 '독립 소국(小國)' 지배자!=발굴자인 임 교수는 "고대사를 특정 세력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백제 간접 지배설'을 비판한다. 그는 "고흥의 강력한 소국 지배자가 백제 금동관을 자발적으로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금동관 제작 공인(工人)을 교류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왜인(倭人) 백제 관료(용병)설=백제에서 관료나 용병으로 일하던 왜인의 무덤일 것이다. 권오영 한신대교수의 주장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무덤방은 규슈 등 일본에서 자주 발굴되기 때문. 토기가 없이 갑옷과 투구, 칼, 투겁창, 철 화살촉 등 무기류가 많다는 점도 그렇다. 일본 지배층 무덤은 백제와 달리 무기류가 많다. 대신 우리나라와는 달리 토기는 잘 넣지 않는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토기가 많은 무덤이 발굴되면 "한반도에서 건너 온 사람의 무덤"이라고 평할 정도다.
최병현 한국고고학회장은 "안동고분은 5세기 전반, 전남 고흥지역에 강력한 토착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적"이라며 "이 세력이 전남 순천까지 영향력을 떨쳤던 가야나 영산강 유역의 마한을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