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와 라디오가 없다. 신문도 배달되지 않고 잡지와 책도 없다. 어느 무인도 얘기가 아니다. 20여 년 전 내가 잠깐 머물렀던 우리나라 남쪽 어느 산골 형편이다. 좋은 경치도 사흘이 지나니 심드렁해지고 슬슬 문자(文字)의 허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문자를 사흘 굶었다 해도 시멘트 포장지 문구나 달력 날짜를 재미있게 읽기는 힘들었다. 다행히 그 산골에 도서관(?)이 하나 있었다. 철 지난 게 아니라 여러 해 지난 신문이 뒤처리용으로 놓여 있는 화장실.
서리 가득한 추운 화장실에 앉아 조각난 신문을 읽는 게 문자기(文字氣)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지만,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 신문을 부지런히 읽으며 한자와 문장과 세상을 배우고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 '뉴스페이퍼 키드'였던 나에게는 결코 열악한 환경이 아니었다. 더구나 송나라 유학자 구양수는 책 읽기 가장 좋은 곳으로 침상, 말안장, 화장실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지 않는가. "읽으려는 뜻이 절실하다면 장소야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읍내 버스 터미널로 나와 잡지와 신문을 사서 허기를 채우고 나니 절실했던 뜻이 오간 데 없어졌다. 오늘날처럼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시대가 또 있을까? 길만 나서면 문자의 홍수에 휩쓸린다. 인쇄된 문자가 아니라 '입력해서 날리는' 문자가 난무한다. 무료 배포 타블로이드판 신문이나 하다못해 광고판 문자라도 읽게 된다. 책도 홍수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집계에 따르면 2005년 발행 신간이 4만8535종이고 부수로는 1억1965만6681부였다.
곡기(穀氣)를 채우는 게 산업화 시대의 과제라면 문자기를 채우는 게 정보화 사회와 지식 사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자기에 관한 한 속이 비었으면서도 좀처럼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매끄럽거나 거친 질감, 새것이면 새것대로 헌것이면 헌것대로 풍기는 냄새, 손으로 집을 때 느끼는 무게감. 읽기는 이렇게 오감(五感)과 온몸으로 종이와 사귀는 행위였지만, 이제 우리는 종이에 새겨진 문자의 결과 맥과 길을 스스로 힘써 다스리기보다는 클릭 한 번으로 모니터에 반짝 뜨는 조각난 정보에 기꺼워한다. 읽기에서도 이른바 슬로푸드보다는 패스트푸드에 인이 박여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사고를 숙성시켜 격을 갖춘 글로 표현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즉각적 감정을 꼬인 글로 배설해 남들을 비난한다. 길고 고른 숨의 글을 소화하지 못하고 짧고 거친 숨의 글만 집어삼키기 바쁘다. 사태의 본질을 따져 묻기보다는 드러난 현상을 놓고 왈가왈부하느라 바쁘다. 서양 격언에 "소리는 덧없이 사라지고 문자 기록은 영원하다" 했고, 위나라 황제 조비는 "문장은 나라를 경영하는 것과 같은 큰일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업"이라 했다. 클릭하는 손길을 줄이고 '집어들어 읽어라(Tolle lege·라틴어).' 그 안에 길이 있다.
(표정훈·출판평론가)
입력 2006.03.0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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