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케이블TV 등을 통해 한국에 첫선을 보인 이종격투기는 남녀노소 온국민을 ‘싸움 팬’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빠르게 번졌다. 국내 이종격투기 팬은 약 500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인터넷 까페도 수십만명의 회원을 자랑한다. 격투기 업계에선 “이제 축구, 야구, 농구, 골프와 함께 ‘메이저 스포츠’가 될 날도 머지 않았다”고 기세 등등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성 팬들의 증가현상. 여성들은 잔인한 장면에 비명을 올리며 손으로 눈을 가리지만, 손가락 틈으로는 링을 엿본다. 어느 격투기 체육관이든 여성 팬들의 발걸음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 은평구 정심관의 홍영규관장은 “한명도 없던 여자관원이 최근 2년사이에 10명이 됐다”며 “다른 곳들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종격투기 프라이드FC를 중계하는 케이블 XTM측은 “여성의 격투기 시청율이 1년 사이에 2.25배로 뛰었다”며 “증가추세가 남성보다 오히려 높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역사가 짧은 만큼 국내 기반은 취약하다. 일본의 프라이드FC, K-1 대회엔 4~5만명의 관중이 모이고 수입도 3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대회들은 적자 모면에 급급하다.
스포츠로서의 본질을 의심하는 눈길도 싸늘하다. 스포츠가 아니라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젊은 마니아층은 “격투기야말로 진짜 스포츠”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요일인 15일 수원의 MARC체육관. 대표적인 국내 '풀뿌리 격투기 대회'로 꼽히는 '스피릿 아마추어리그'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대회는 격투기를 취미로 하는 '왕초보'부터 미래의 K-1 파이터를 꿈꾸는 '예비스타'까지 누구나 출전하는 대회. 아담한 체육관에서는 200여명의 선수와 관중들이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다. 스포츠머리의 중학생과 고교생, 대학원생, 직장인 파이터들이 차례차례 링 아래에서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키 1m57㎝, 몸무게 47㎏로 출전자 중 최단신, 최경량인 고교 1년생 김보용(17)군이 등장하자 관중석에서 '초등학생 같다'며 웃음이 나왔다. 보용군은 체구에 맞는 상대를 고르지 못한 탓에 몇 차례나 데뷔를 연기하다가 대망의 실전 링에 올랐다. 하지만 단신인 그가 보여준 것은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이었다. 보용군은 자기보다 20㎝나 큰 진경수(15)군을 날카로운 로킥으로 계속 공격한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는 "단신 선수가 이렇게 기술로 이기는 거, 이게 격투기의 진짜 매력"이라면서 '헤헤' 웃었다. "밖에서 싸움질하면 치료비 물어줘야죠? 여기선 합법적으로 싸울 수 있다니까요." 얼굴을 봐선 영락없이 똘똘한 모범생 스타일인데 몸은 굉장히 단단했다. 그는 "프라이드FC 선수가 되는 것이 희망"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동료들을 응원하러 나타난 최경미(19)씨는 올해 경찰행정학과 진학을 앞둔 예비 여대생. 그녀는 합격통지서와 함께 "무도를 배우고 오라"는 학교측의 권유로 격투기 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격투기는 여자가 하기에 잔인한 경기 아니냐"고 묻자 거침없이 되받는다. "스파링하다 쌍코피 난 적은 있지만… 괜찮아요. 저도 코피 나게 때려주면 되니까."
물론 이 대회 출전자들의 기량을 K-1이나 프라이드FC 선수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선수들은 조금만 체력이 떨어져도 집중력을 잃기 때문에 심판들이 "집중해"를 수없이 외쳐야 한다. 하지만 대회 주최자인 박광현 엔트리안 사장은 "잘 보면 이 경기들이 더 재미난다"고 했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플라잉 니킥'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쓰러진 한 선수가 무아지경에서 손으로 다리를 잡고 쓰러뜨려 '기술'을 걸기 시작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경기는 끝난 상태였고 다리를 잡힌 사람은 상대 선수가 아닌 주심 백종근씨였다. 주심 백씨는 "계속 싸워야 한다는 집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가끔 넘어지면서 충격 받으면 심판을 공격하는 선수들도 있죠. 이젠 익숙해요." 지루한 경기도 있다. 링 바닥에서 껴안고 용만 쓰는 선수들에겐 "계속 그렇게 사랑이나 하셔~"라는 핀잔이 쏟아진다.
관중석에는 처음 출전하는 친구를 응원나온 30대 직장인 가족도 있었고 애인을 격려하러 온 여자친구도 있었다. 한 여성 유치원교사는 올해 27세인 회사원 남자친구가 "나이 더 먹기 전에 나가고 싶다"며 출전을 강행하는 바람에 팔자에 없는 '링 세컨'으로 나섰다. 어색한 손길로 마우스피스를 물에 씻어주던 그녀, 남자친구의 험한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녀는 "안쓰럽기는 하지만 말릴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전문 선수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어요. 맞으면서 크는 거겠죠, 뭐. 자꾸 보니까 통쾌함이 있는 스포츠네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격투기를 진행하는 이벤트업체는 '스피릿MC'와 '코마' 두 곳이다. 2003년 격투기가 한국에 상륙할 때만 해도 한국 격투기는 기초가 전무한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최홍만, 데니스 강, 최무배 등의 격투기 스타들이 탄생하면서 파이터를 꿈꾸는 선수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프로와 세미프로 선수를 합해 500여명의 선수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정기적으로 아마추어들이 기량을 겨루는 대회도 열린다. 물론 대회의 수준은 아직 빈약하지만 스타플레이어를 꿈꾸는 도전자들, 격투기를 즐기는 애호가들은 서서히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이날 승리한 선수들에게는 흔한 트로피도 주어지지 않았다. 상장 한 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파이터'들은 상장을 손에 들고서 응원나온 동료들과 함께 신나게 디카, 폰카를 눌러댔다.
이종격투기는…
이종(異種)격투기는 문자 그대로 각종 격투기가 한곳에 모여 최강자를 가리는 경기. 최근에는 '종합격투기'라는 용어도 쓴다. 영어로는 통칭 MMA(Mixed Martial Arts·종합 무술)라고 한다. 대회 방식은 크게 종합격투계와 입식타격계로 나뉜다. 종합격투계는 펀치와 킥, 그래플링(관절 꺾기, 조르기 등의 기술)이 모두 허용되는 방식이고 입식(立式)타격계는 선 채로 펀치와 킥을 날리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K-1, 프라이드FC(Fighting Championship) 등은 특정 격투기 이벤트의 이름. K-1은 93년 일본에서 시작된 입식타격계의 최고 인기 대회다. 가라테(KARATE), 킥복싱(KICKBOXING), 쿵후(KUNG-FU) 등 서서 싸우는 격투기 중 '넘버 원(1)을 가린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