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를 세탁하라.” 국내 대학이 외국의 유명 대학보다 면학(勉學) 분위기가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재수강제도 때문이다. 국내의 대다수 대학들은 외국 대학과는 달리 재수강을 거의 무제한 허용한다. 게다가 학교가 보관하는 ‘성적 원부’에는 원래 성적이 남지만, 학생들에게 발급해 주는 성적증명서엔 재수강해서 새로 딴 학점만 기재된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온갖 수강 왜곡 현상은 대학 경쟁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서울대의 수강제도를 심층분석 해본다.
◆너도나도 재수강
지난 2000년 자연대를 졸업한 A(31)씨는 19개 과목 57학점을 재수강했다. A씨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런 것처럼 '군대 가기 전에 실컷 놀고 나서 제대하고 재수강하지'라고 생각했다"며 "이공계는 학습량이 많아 재수강이 보편화돼 있다"고 말했다. 사회대 01학번 구모(23)씨는 "동아리 활동이나 다른 일을 하다보면 성적이 잘 안 나올 때가 있다"며 "그럴 때는 솔직히 재수강 할 생각에 포기한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B- 이상의 학점을 받고도 재수강하는 학생도 늘고 있어 폭넓은 교양을 쌓아야 할 대학생들이 '학점의 노예'가 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2001~2004년까지 교양 과목 재수강률은 9~11%, 전공과목의 재수강률은 8~9%에 이른다. 또 B-~A0의 학점을 받은 학생이 2004년 1학기에 교양과목을 재수강해서 A+를 받은 경우는 34.77%나 됐다. B0를 받았다가 재수강해서 A+를 받은 인문대 01학번 김모(22)씨는 "요즘 학생들은 학점에 목 매는 정도가 심하다"며 "수강 신청 때에도 학점 잘 주는 과목을 찾거나, 성적이 잘 안 나온 과목을 재수강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인문대 심모(36) 강사는 "대학에서 어렵지만 꼭 필요한 과목은 점점 사라져가고 학생들의 입맛에 맞는 과목만 남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각한 수강 왜곡현상
서울대는 지난 5월 계절학기 수강신청을 놓고 홍역을 치렀다. 수강신청 시작 직후에 교양 필수 과목인 대학국어나 대학영어 등이 마감되자 서울대 사이트 '스누라이프'(www.snulife.com)엔 수강신청과목을 사고팔거나 다른 과목과 교환을 원하는 내용의 글이 30여건 올랐다. 졸업을 앞두고 교양과목을 재수강하지 못하게 된 학생들이 다급한 심정에 5만~10만원씩을 주고 수강권을 사려 한 것이다.
반대로 학기 중에는 대학국어나 대학영어 등 기초교양 과목이 폐강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저학년들이 고학년 재수강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것을 기피해 버리기 때문이다. 2004년도 1학기엔 대학국어 63개 강좌 중 수강생 부족으로 16개(25.4%) 강좌가 폐강됐고, 2005년도 1학기엔 77개 강좌 중 9개(11.7%) 강좌가 폐강됐다. 대학영어 역시 2005년도 1학기엔 71개 강좌 중 9개(12.7%) 강좌가 폐강됐다. 경영대 04학번 김모(21)씨는 "아무래도 재수강생이 학점 따기에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그 사람들 때문에 성적이 밀리면 솔직히 좀 억울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임현진 원장은 "학생들이 전공 진입을 앞두고 상대적으로 학점 취득이 어려운 대학국어나 대학영어 등 기초 교양과목을 1학년 때 이수하지 않고, 고학년 때 이수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자원 낭비와 개선 노력 수포
변창구 서울대 교무처장은 "재수강 인원이 많아져 필요 이상의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며 "10명이 들어야 할 수업을 15명이 들으면 교수 1명이 담당해야 할 학생 수가 그만큼 늘어 학생들의 수업환경도 악화된다"고 말했다. 변 처장은 또 "재수강생과 처음 듣는 학생 간의 이질감뿐만 아니라, 재수강생은 이미 1번 이상 들은 내용이라 수업에 열중하지 않아 전체 수업 분위기가 산만해진다"고 말했다.
재수강의 폐해가 커지자 서울대는 지난해 학사운영위원회를 열어 '재수강 제한을 위한 성적증명서 개선안'을 검토했다. C+ 이하인 과목에 한해 재수강을 허용하거나, 성적증명서에 재이수 과목임을 알 수 있도록 (R)을 표시하는 방안 등이 검토됐다. 그러나 학사운영위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데다 학생들의 반발이 커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