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직후 발생한 조선인 대학살 당시 한 일본인 경찰서장이 조선인 수백명의 목숨을 보호했다는 자료가 발견됐다.
3일자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따르면, 일본 요코하마(橫濱)시 쓰루미(鶴見)구 쓰루미경찰서에서 300여명의 조선인을 보호한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 서장과 외국인 추방을 요구했던 당시 지방의회 의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회고록이 공개됐다.
당시 오카와 서장이 조선인들을 보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는 했으나, 기록으로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회고록은 당시 쓰루미구의 마을회의에 참석했던 한 의사(당시 55세)가 태평양전쟁 이전에 기록한 것으로, 손자가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회고록에는 '조선인들이 무리를 지어 약탈을 거듭하면서 저항하는 일본인을 죽인다'는 헛소문이 난무하고 많은 일본인 젊은이가 조선인 폭행에 가담하고 있다는 목격담 등이 기술돼 있다.
지방의원단이 오카와 서장에게 "경찰서장이 솔선해서 조선인을 단속, 불안을 일소해야 하는데 오히려 300명을 보호하는 것은 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라며 "조선인이 소동을 일으키면 30명의 순사들이 진압할 수 있는가"라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오카와 서장은 "조선인의 약탈·살인 이야기는 근거없는 유언비어"라며 "보호 중인 조선인의 소지품 검사를 했으나 작은 칼 하나도 없었다. 일단 경찰의 손을 떠나면 곧바로 전부 학살될 것인 만큼 수용인원이 늘더라도 보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맞섰다.
오카와 서장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인 만큼 경찰서로 와 확인해보라"고 했고, 의원들이 직접 확인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는 이들의 대화 내용이 16쪽에 걸쳐 기록돼 있다. 회고록은 "유언비어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조선인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고, 이쪽(일본인들)도 한때 공포에 빠진 것은 실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카와 서장은 1940년 63세 나이로 사망했다. 오카와 서장의 손자(53)는 마이니치의 취재에 대해 "정년 전에 경찰을 그만두셨다고 들었는데, 조선인들을 두둔한 것이 문제가 됐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재일한국인단체는 지난 1953년 쓰루미구에 있는 오카와 서장의 묘 옆에 감사의 비석을 세워주었다.
(도쿄=정권현특파원 khj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