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8월 11일 상하이 항구. 변발을 길게 늘어뜨린 앳된 아이들이 미국행 여객선에 올랐다. 아홉 살에서 열다섯 살짜리 소년 30명이 한 달간의 긴 항해 끝에 내린 곳은 샌프란시스코. 여기서 대륙 횡단기차를 타고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인 코네티컷에 도착, 유학생활에 들어간다. 이들은 청 정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파견한 국비 유학생의 1진이었다. 청 정부는 1875년까지 매년 30명씩, 모두 120명을 미국에 파견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혁명 등 안팎의 도전에 시달리던 청 정부는 서양의 군사·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시도하면서 미국 조기 유학생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서였다. 당시 양무운동을 추진하던 실력자 증국번, 이홍장이 이 유학생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원래 계획은 이들을 15년간 유학시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까지의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졸업 후 2년간의 유학 비용까지 정부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보수파들은 "서양 문화에 물들어 중국의 정신을 잃게 됐다"면서 유학 철회를 주장했고, 10년 만인 1881년 조기 유학생들은 귀국했다. 당시 이들 중 50여명은 하버드대, 예일대, 컬럼비아대, MIT 등 명문대에서 수학 중이었다.
유소년기에 미국 유학을 시작한 이들은 놀랍도록 빨리 서구 문화에 적응했다. 중국 유학생들로만 이뤄진 무적의 야구부를 조직하는가 하면, 대학 조정부에서 명조타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들이 초기에 정착한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트에 살았던 작가 마크 트웨인과 친구가 됐고, 그의 딸과 댄스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쓴 스토 부인도 유학생들과 교류를 나눴다. 남북전쟁의 영웅인 미 그랜트 대통령은 1874년 필라델피아 박람회를 구경온 이 유학생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귀국 후 이들은 대부분 이홍장 아래의 북양해군에서 철도, 전신, 광산 등 근대 산업의 개척자로 활약했다. 중국인 최초로 철도를 부설한 첨천우를 비롯, 청조 외무대신을 역임한 양돈언, 중화민국 초대 총리 당소의도 조기 유학생 출신이다. 예일대 조정부 조타수였던 종문요는 훗날 상하이-난징철도와 상하이-항저우 철도 총재를 지냈다. "중국의 정신을 잃었다"는 비판에 반박이라도 하듯, 외국과의 전쟁에서도 피를 뿌렸다. 1884년 청불전쟁에 참전한 유학생 출신 4명이 전사했는데, 이들 중 설유복, 광영종, 양조남은 MIT에서 공부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도 조기 유학생 출신으로 일등항해사였던 심수창과 진금규가 희생됐다.
청 정부의 조기 유학 계획은 예일대를 졸업한 용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광동성 향산현 출신인 용굉은 유년 시절, 홍콩의 기독교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다가 선교사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1854년 예일대를 졸업한 그는 20년 가까이 유학 프로젝트를 추진한 끝에 이홍장의 승낙을 얻어냈다. 용굉은 하트포트에 설치된 중국 유학사무국 책임자로 유학생들을 이끌었다.
유학생들은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무너져가는 청조와 군벌 대립으로 이어진 현대 중국을 일으켜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잊혀졌다. 작년 이맘때 중국 관영매체인 CCTV는 이 책 필자들이 제작에 참여한 5부작 다큐멘터리 '유동(幼童)'을 방영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개혁·개방 이후 부국강병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의 변화가 130여년간 잊혀져 있던 조기 유학생들의 실패한 역사를 되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