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이연경씨는 아우디의 검정색 2인용 스포츠카 '티티'를 타고 다닌다. 티티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홍보대행사 버슨 마스텔러 코리아에서 일하다 3년 전 아우디 홍보팀으로 스카우트된 그에게 맡겨진 첫번째 업무가 티티의 론칭 행사. 훤칠한 미모의 여성들이 나와 자동차를 소개하는 식은 구태의연해서 싫었다.
타깃은 젊은층. 파티를 떠올렸다. 전략은 딱 맞아떨어졌다. 인터넷 자동차 동호회 모임들을 통해 파티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2000명의 젊은이들이 앞다퉈 파티장으로 달려왔다. 그해 티티는 국내 2인승 스포츠카 판매에서 1위를 차지했다.
"대한민국을 팔아드립니다!" 한국의 홍보업계는 여성들이 장악했다. 한국의 국가 신인도(信認度) 해외 홍보, '한국 방문의 해' 해외 PR부터 LG, 삼성전자, 기아자동차라는 기업을 미국·유럽 시장에 널리 알린 손길까지,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답게 무언가를 알리고 파는 일에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100여개에 이르는 홍보대행사의 CEO부터 임원, 직원 등 홍보 인구의 70%가 여성이다. 정부를 비롯해 대기업의 해외 홍보를 전담하는 버슨 마스텔러 코리아와 에델만 코리아 같은 국제적 네트워크 홍보회사는 구성원 80%가 여성일 정도다.
단순한 상품 광고가 아니라 기업 이미지와 마케팅를 총괄하는 홍보 직종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때 처음 일을 배운 30대 여성들이 최근 앞다퉈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여성들의 새로운 '창업' 무대로 등장했다. '10대 홍보대행사'로 꼽히는 메리트 버슨 마스텔러· 인컴브로더·KPR·프레인·플래시만힐라드·뉴스컴·에델만·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커뮤니케이션즈 신화·시너지힐앤놀튼의 CEO중 3명이 여성이다. 웨스틴조선(안주연)·서울프라자(원선아)·하얏트(박경서)·워커힐(서일화)·롯데(공진화)·인터컨티넨탈(김현숙)·리츠칼튼(한경진)·메리어트(조윤희)·아미가(엄서민) 호텔 등 홍보와 마케팅 비중이 큰 국내 10대 특급호텔 중 9곳이 여성의 머리와 손으로 국내외에 자기 호텔을 알리고 있다. 이 중 5명은 홍보실을 이끄는 책임을 맡고 있다.
남자들 영역으로 고수되고 있던 기업 홍보실에도 여성 임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설호정 풀무원 상무를 필두로 박찬희 월마트코리아 상무, 김영은 BMW코리아 상무, 김예정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상무, 이선주 로레알 코리아 홍보이사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왜 홍보업계에 여성 진출이 공격적으로 느는가.
무엇보다 사회 변화가 그 이유로 첫손 꼽힌다. 시장 개방과 국제화 분위기가 큰 원인이 됐다. 2000년 이후 외국 대규모 홍보회사들의 한국 진출과 합병이 성황을 이루면서 홍보의 개념은 한층 더 넓어졌다. "다국적 기업들은 릴레이션십뿐 아니라 기업의 위기관리까지 주문한다" "예전의 기업 홍보실이라면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기사를 주고받고나 안 좋은 기사를 막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회사 이미지까지 파는 시대가 됐다" "외국계 기업이 국내 시장에 많이 진출하면서 홍보 업무가 훨씬 투명해졌다"는 한 60대 여성홍보인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재치와 따뜻함 등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남자들보다 뛰어나다. 외국어 실력도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력이 많다"(정윤영 버슨 마스텔러 코리아 대표)는 의견도 있다. 홍보업계의 '스타'로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조안 리(58) 스타커뮤니케이션 대표는 "다국적 기업들은 고급정보 제공, 컨설팅, 제품 프로모션 등 통합적인 기능을 수행해줄 것을 요구했고, 여기에 외국어실력과 매너가 앞선 여성들이 대거 포진하게 됐다"고 분석한다. 제품 구매력을 주부(여성)들이 쥐게 된 것도 홍보업계의 우먼파워를 더욱 단단히 굳힌 요소다. 대표는 물론 20명 전 직원이 여성으로 이뤄진 PR게이트는 클라이언트의 절반 이상이 LG전자·테팔·유니레버·헹켈 등 생활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업들이다. 강윤정 대표는 물론 "소비 주체의 요구와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제품 홍보의 관건"이라면서, "트렌드에 민감한 여성들이 PR기술에서 한발 앞서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키위용 '컷앤스쿠프(Cut & Scoop) 스푼'을 개발해 뉴질랜드 제스프리 키위의 한국 진출을 성공시킨 이 회사는 매년 60%씩 성장하고 있다.
홍보 영역의 전문화도 여성들이 주도한다. 채윤희(53)씨가 대표로 있는 '올댓시네마'는 영화 '쉬리' '꽃피는 봄이오면' 등 200여편의 영화 홍보를 담당한 영화전문홍보업체다. '젊은기획' '영화인' 등 후발 업체도 15개나 되고, 구성원의 90%가 여성이다. '마콜'은 제약 분야와 헬스 케어를 전담한다.
그러나 '여초' 현상이 심한 홍보업계에서도 '유리천장'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10대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여성의 41.3%가 일반직인 데 반해 남성의 85.4%는 임원 및 관리직이다. 한미정 한양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아직도 여성은 전략적 컨설팅이나 의사 결정 업무보다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자적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여성이 경영층에 많이 속한 조직에 남녀평등의 기회가 더 많다는 사실을 볼 때 여성 CEO들이 더 많이 배출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얏트, 르네상스 등 호텔업계에서 쌓은 노하우로 2003년 월마트 홍보담당 상무이사로 스카우트된 박찬희씨는 "자기만의 칼라를 바탕으로 전체 조직에서 홍보가 가질 수 있는 독창성을 과시해라.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채윤희씨는 "인맥 쌓는 일에 소홀히해서는 안된다"면서, "인간관계를 넓히고 관리하는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