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영웅의 역사는 받아쓰는 역사였다. 예컨대 '구약성서'의 작가들은 이미 알렉산더의 출현에 대해 이렇게 받아쓰고 있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시기가 도래하리라. 백성들은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衰敗)하리라. 사악한 사나이는 서약을 등지리라." 하지만 유행어를 빌리자면, 인간의 역사는 그때그때 다르다.
알렉산더는 델피 신전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지만, 이는 신탁을 내릴 수 없는 날임에도 막무가내로 자신의 운명을 얘기해달라는 알렉산더의 끈질김에 지친 여사제의 탄식이었다. 그건 신탁이기도 하고 탄식이기도 하다. 이게 올리버 스톤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올리버 스톤은 역사에 진실이 없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게 바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의 진실이 나의 진실일 수는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
영화 '알렉산더'에서 아버지 필립은 술과 여자를 탐하는 전쟁광으로 묘사됐다. 첫 장면에서 올리버 스톤은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강간하려는 필립의 모습을 어린 알렉산더의 시선에서 담는다. 당연히 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마는 신화 속의 영웅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알렉산더가 신화 속의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그가 염두에 둔 인물은 아킬레우스라고 말한다. 그는 무적의 전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알렉산더를 현대 심리학의 포로로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동방 원정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실천했다. 이 때문에 관대한 전사이자 위대한 지략가였던 필립왕은 영화 속에서 술주정뱅이 전쟁광의 모습으로 고정된다. 페르시아의 왕비나 나중에 알렉산더와 결혼하게 되는 록산느는 역사서 속에서 동방 최고의 미녀라고 묘사돼 있으나,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됐다. 결국 알렉산더는 위대한 황제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전락한다.
■친구들
다리우스를 패퇴시킨 알렉산더는 그의 가족들을 자비롭게 대했다고 역사서는 전한다. 그러니까 그리스의 역사서는 말이다. 하지만 다리우스의 아내와 딸들이 페르시아 최고의 미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 좀 미심쩍다. 게다가 알렉산더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아마존 여왕과 14일 동안이나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전설까지 내려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영화 내내 알렉산더는 성불구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모두 친구인 헤파이션과의 동성애 문제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원정에 지친 그를 시험한 것은 '섹스와 잠'이었다는 역사서의 문장들은 모두 지워진다. 정통적으로 알렉산더와 헤파이션의 관계는 그가 전쟁터에서도 늘 지니고 다녔던 '일리아드'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상징한다. 이는 다른 친구들과도 마찬가지다. 알렉산더의 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술에 취해서 친구인 클레이투스를 죽인 일 때문이었다. 알렉산더가 사마르칸트 전투에서 패한 지휘관을 비난하자, 클레이투스는 알렉산더가 모든 것을 독차지한다고 비난했다. 결과는 취중 살인이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에서는 알렉산더가 어머니를 닮은 록산느와 결혼했을 때부터 둘 사이의 갈등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클레이투스가 내뱉은 어머니에 대한 욕설 때문에 친구를 죽이게 만든 것처럼 그렸다. 올리버 스톤으로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우가멜라 전투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독수리는 알렉산더의 생애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밀레투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가우가멜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알렉산더의 머리 위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예언가들은 이 독수리가 승리를 상징한다고 봤다. '알렉산더'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와 일대 격전을 벌이는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침략자 혹은 제왕' 등 역사서는 이 무모한 전투를 벌이기 전에 알렉산더가 한 행동을 잘 묘사해 놓았다. 알렉산더는 병사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 그들의 공훈을 치하하고 그리스를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 소리쳤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원정이 성전이며 페르시아의 압제에 놓인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화에서도 이는 그대로 재현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아르메니아 산맥으로 도피했다가 수염이 텁수룩한 채 죽은 채로 발견되는 다리우스의 모습과 묘하게 공명한다. 올리버 스톤은 '알렉산더'가 궁중 암투를 배경으로 한 오이디푸스극을 뛰어넘어 현대에 대한 풍자로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무리한 욕심 때문에 영화는 삐거덕댄다. 하지만 덕분에 한국 관객들도 당대의 역사에 대해 명상할 권리를 얻게 됐다. 왜냐하면 가우가멜라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지금의 아르빌, 그러니까 자이툰 부대의 주둔지 부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이쯤 되면 올리버 스톤의 역사 해석이 좀 지루해진다. '알렉산더'의 화자는 프톨레마이오스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원정에 지친 장군들이 알렉산더를 독살한 것이라는 걸 은연중 암시한다. 알렉산더 독살설에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개입돼 있다. 그러니까 '설'이다. 이런 설을 끌어들인 까닭은 타의로 영웅이 된 콤플렉스 덩어리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타의로 영웅이 됐으니 타의로 죽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물려준 막강 마케도니아 밀집 보병, 수많은 전투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와 지략 등 객관적인 조건은 모두 지워진다. 이 영화의 전투 장면이 악몽으로 그려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원한 소년만이 꿈꿀 권리가 있으며, 그 소년은 늘 잔인한 세계의 음모로 죽는다고 올리버 스톤은 믿는 듯하다. 이게 바로 알렉산더라는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는 올리버 스톤의 시각이다. 그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는 유치한 까닭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정복, 동방 원정, 치밀한 식민정책 등 알렉산더가 남긴 유산은 다 뭔가? 우리가 그를 죽였다는 말이 멋있게 들리기는 하지만, 공허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누구인가?
BC 356~323. 마케도니아왕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로도 불린다.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셨고, 부왕이 암살된 후 20세에 왕좌에 올랐다. BC 334년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간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인도까지 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