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일본으로 넘어갔다. 처음 일본에서의 나는 예민과 신경질과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몸무게는 약속한 90kg을 넘었지만, 문제는 일본어였다. 처음 전체 배우가 모여서 리딩을 하는데 눈앞이 깜깜하고, 다 하고 나서는 다리가 뻣뻣해질 정도였다.
일본배우들은 대사를 칠 때 '~마'가 많은 편이다. '~마'가 있으면 내가 할 차례인가 싶어서 대사를 냉큼 친다. 그러면 그 조용한 일본배우들이 모두 나를 보며 고개를 흔드는 거다. "아직 남았어요"하면서. 그때부터 내 신경질이 시작됐다. 한국에서 나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 선생에게도 욕하고, 잠깐 다니러 온 승재형을 잡고 막 화를 냈다.
상대역 나카타니 미키를 비롯한 배우들이 매일 내 숙소를 찾아와 일본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대충 발음을 잡아가고 있을 때 그 공부를 끊어버렸다. 그들도 배우라 그들에게 배우면 감정까지 따라 하게 되겠다 싶었다. 대신 NHK아나운서가 감정없이 녹음한 테이프를 계속 들으며 내 감정대로 가자고 맘먹고 있었다.
레슬링, 또 할 말이 많다. 촬영한 필름을 확인한 (송)해성(감독)형이 그랬다. 레슬링 장면을 보는데 내가 계속 "나 죽겠네, 아이고 나 죽겠네" 하더란다. 난 기억도 안 나는데.
나는 일단 이 영화를 마친 내 자신이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일본어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면, 레슬링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 나를 괴롭혔다.
레슬링은 와이어도 대역도 없이 가기로 했다. 맨몸에 팬티만 입고 있는 '특별한 의상' 때문에 와이어를 달 데가 없다! 열흘로 잡혀 있는 레슬링 촬영. 첫날. 문제의 미국 레슬러(벤샤프 형제로 출연)들과의 레슬링이자 영화의 첫 번째 레슬링. 촬영 전, "형, 내가 못 들면, 우리가 블루매트 위에 누워있을 거니까, CG로 세워줘"라고 농담을 했다. 슛이 들어가고 처음으로 그들이 나를 내동댕이쳤다. 2m가 넘는 머리 위에서, 몸무게의 가속도가 붙어서 바닥에 떨어졌다. 숨이 3초간 멈추어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카메라 두 대는 저 뒤에서 '쩍'하니 버티고 있었고, 한치의 속임수가 있을 수도 없었다.
역도산의 레슬링은 한 회를 계속 롱테이크로 갔다. 해성이형은 내가 힘들까봐 나눠찍지 않겠다고 했고, 나눠찍지 않으니까 진짜로 해야 했다. 나는 약속한 대로 거구를 들어 머리 위로 넘겨버렸다. 일본에서는 들 엄두도 못냈던 사람들이었다. 그때 내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앗싸!"였다. '앗싸'라는 일본말은 없다는데, 에이씨, 지울 수 있을까?
레슬링 장면을 찍고 나면 주위에서 말을 못 붙일 정도로 예민해졌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선수들은 실제로 유명한 선수들이다. 그 선수들이 경기를 하면 그 표를 한 달 전부터 구할 수 없게 될 정도란다. 그런 선수들이 나에게 맞아서 멍들고 등이 시커멓게 죽었다. 나도 그들에게 진짜로 많이 맞았다. 철제 의자로 맞아서 팔꿈치 인대가 부었고, 발목도 다쳤다.
진짜로 게거품이 입에서 올라오던 레슬링 촬영. 창피해서 CG로 지워달라고 했건만, 리얼하다며 안 지운 해성이형. 레슬링 장면이 끝나고 후지 타츠야는 "묵묵히 레슬링을 해내는 배우와 그걸 묵묵히 시키는 감독과 그걸 지켜보는 스태프들 때문에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고 했다. 어쨌건, 지옥 같던 레슬링 장면은 10일 만에 끝났다.
(설경구·영화배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