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인 집단에는 고집 센 사람이 한둘씩 박혀 있기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고, 일의 빠른 진행을 방해하기도 하는 고집쟁이는 남 생각을 하지 않고 무리하게 제 주장만 펴는 사람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류(時流)요 현실이라는 핑계로 순간의 편의와 이익만을 좇기보다는, 원칙을 지키며 사는 고집쟁이도 있다.
그런 고집쟁이로는 숙종 때 사람인 황순승(黃順承)을 첫손가락 꼽는다. 평양 사람인 그는 이름보다는 황고집(黃固執)이란 별명으로 흔히 불렸다.
신광수와 이덕무의 문집을 읽다가 평양의 명사로 그를 소개하는 글을 거듭 만났다. 친숙한 느낌이 들어 찾아보니 그의 고집이 만들어낸 갖가지 기이한 행동을 쓴 글이 제법 많다.
당숙과 함께 성묘를 하러 간 황고집이 묘가 있는 산까지 얼추 2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눈이 녹은 진흙탕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당숙이 왜 그러냐고 묻자 "묘가 있는 산이 보입니다!"라고 했다. 당숙도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려 천신만고 끝에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 그 뒤 당숙은 늘 그 일을 말하며 "쯧쯧, 순승아!"라고 혀를 차며 다시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
황고집이 밤길을 가다가 도적떼를 만나서 타고 가던 말을 빼앗겼다. 도보로 얼마를 가다가 걸음을 돌려 돌아와서는 손에 잡고 있는 채찍을 주면서 "말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이 채찍을 쓰시오!"라고 말하고는 되돌아갔다.
도적이 놀라서 "당신 혹시 황고집씨가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도적떼는 "현자(賢者)가 타던 말이다!"라고 하며 그냥 가버렸다.
황고집이 서울에 볼 일을 보러 왔을 때 서울 사는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동행한 사람이 마침 잘됐다고 하며 이참에 문상하자고 했다. 황고집은 거절하며 "이번에 상경한 목적은 문상이 아니다.
다른 일을 하던 차에 친구의 문상을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며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오로지 문상을 하기 위해 그는 다시 상경했다.
황순승이 고집을 피운 일화는 하나같이 엉뚱하고 기발하기 짝이 없다. 누가 뭐라 하든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 남의 이목이나 빈정거림에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편협한 고집쟁이로 내놓았다.
그런데 그의 행동에는 일관된 그 무엇이 있다. 부모에 대해 공경하고, 남에게 예의를 갖추며,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아니하며, 소박하게 천진함을 지킨다는 원칙이다.
그 원칙을 편의와 이익 때문에 수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고 철저하게 지키려 했다. 호를 집암(執庵)이라 했는데, 집(執)자에 원칙주의자의 소신이 풍긴다.
이 호는 '중용'에 나오는 "선을 택하여 굳게 지키라(擇善而固執之)"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일 게다. 엉뚱하고 편협하며, 한편으로는 어이없게 느껴지는 그의 행동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선하고 천진한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별명 황고집은 융통성 없이 집요하게 제 주장을 펴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생존시부터 먼 후대까지 그는 평양을 대표하는 인물의 하나로 꼽혔다.
평범한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만을 골라 했으나 평양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이덕무는 황고집이 물정에 어두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편협한 사람의 정신을 일깨운다고 치켜세웠다. 그는 가정 내에서 더욱 엄한 원칙을 세워 집안을 이끌었다.
그의 증손자인 황염조(黃念祖)가 가풍을 이어 시인으로 알려졌고, 현대에 이르러 저명한 소설가 황순원씨도 그의 후손이라 한다.
모두 시류에 흔들리지 않은 고집스런 원칙을 지키는 분들로 이름이 있다.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에 그의 고집이 아름답게 보인다.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