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30일, 고속철도 천성산 터널의 공사 현장은 다가올 태풍을 대비해서 대부분의 자재를 치우고 공사장 인부들도 철수한 상태다. 마치 아군이 후퇴하면서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해 진지를 말끔히 치워버린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황량한 느낌마저 드는 이곳은 지난 10개월 동안 고속철도 대구-부산 구간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곳이다.
하지만 공사는 26일부터 전면 중단된 상태이고, 토공작업 중의 삼림 훼손 부분과 공사중단 동안의 안정을 위한 정리 작업만을 하고 있다.
이는 지난 27일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공사중단 지시 공문을 내렸기 때문이다. 공단은 공문에서 “부산고등법원에 항고심 진행중인 경부고속철도 천성산구간 공사착공금지 가처분 소송과 관련하여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지율스님은 재판부의 권고를 존중하여 13-3, 13-4공구 공사를 항고심 판결까지 중지키로 합의함에 따라 별도의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04. 08.26일부터 공사 임시 중지를 지시한다”라고 했다.
13-3공구 시점은 울산시 울주군 삼동(삼남)면에 천성산 터널이 시작되는 부근인 원효터널 진입로 부근으로, 원효터널 13.27Km중 8.83Km는 SK건설이, 나머지 13-4공구시점과 부산시 노포동 개곡리마을 부근의 공구 종점은 현대건설이 주관사로 공사를 각각 진행하고 있다. 13-3공구를 맡은 SK건설측은 터널의 진입로 부근의 공사는 거의 완료된 상태이며, 얼마전까지 터널의 출입문을 세우고 굴을 뚫기 위한 사전 작업인 굴진공사를 약 20m 해놓은 상태. 13-4공구의 현대건설은 원효터널의 나머지 부분 중 진입로 공사를 하고 있는 단계여서 이제 시작 수순이었다.
정부와 환경단체와의 마찰은 1994년 10월 고속철도 천성산 통과에 관한 환경부 환경영향평가에서 천성산의 늪과 계곡, 숲에 서식하는 30여종의 보호 동·식물이 단 한 종도 기록되지 않았고, 22개의 늪과 12개의 계곡, 39개의 저수지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지질이나 지하수에 대한 조사가 전무하다는 점이 시민단체에 의해 제기되면서이다. 시민단체들은 ‘천성산지킴이(도롱뇽의 친구들)’를 발족시키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 뒤 2004년 2월 울산지법이 ‘도롱뇽과 그 대변인’을 원고 부적격이란 사유로 각하(却下)시키자, ‘도롱뇽의 친구들’은 부산 고법에 항고심을 냈다. 지율스님은 지난 6월 30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공사중단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였고, 26일 시설공단 영남지역본부장과 대한불교조계종 내원사 지율스님이 ‘고법의 판결이 나오면 이를 따르기로 하되 그동안에는 공사를 일시 중단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환경단체들은 "천성산은 국내에서는 희귀한 고층습지로 저온성, 호산성의 특징과 이탄층이 쌓여 산성토질로 후대에는 유용한 광물자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고, 이삭귀개, 끈끈이주걱, 좀고추나무 같은 특이한 종이 서식하고 있어 보존의 가치가 높다"고 주장한다.
이곳을 찾은 국립중앙과학관의 이상명(44) 연구사는 "천성산에 터널을 뚫을 경우 어떤 환경변화가 일어날지는 미지수"라며 "이런 문제는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지질학자가 결정해야 타당할 것"이라며 "고속철이 통과할 경우 지질학적으로 배사 구조가 어그러질 가능성이 있어, 5~10년 후에는 습지의 물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SK건설의 박태준 공사과장은 "환경단체나 지율스님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전문적인 시공법으로 대비하고 있다"며 "보존 못지 않게 유라시아 물류동맥을 잇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완성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대건설 이홍기 공무부장은 " 여름내내 고생해 이제 작업 공정이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다시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갔고,10개월 동안 진행된 공사동안 숙련된 인력을 이제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며 "공사 종점부의 개곡리 마을과 공사 시점부의 소주리마을 사람들의 민원도 유연하게 해결했고, 우리는 하라는 것만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평산터널 예정 구간의 인근 주민 최경희(38)씨는 "공사 중에 소음, 분진, 진동 등으로 인해 괜히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분간만이라도 공사가 중단된다니 속이 시원하다"며 "천성산은 보호야생동식물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당연히 보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부근의 영산대학교에 재학 중인 이진훈(26)씨의 말은 달랐다. 이씨는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환경단체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고속철도는 국책 사업으로 어차피 완공해야 하는 일인데, 반대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공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서 혜안을 발휘해야 할 것"이라며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