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 학자는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면서도 역사와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이 만든 역사 잡지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지난 6월 2일 만 80세로 별세한 이기백(李基白) 서강대 명예교수는 마지막으로 책임 편집한 ‘한국사 시민강좌’ 제35집에 ‘한국사의 진실을 찾아서’를 썼다. 이 교수는 이 글 뒤에 짤막한 ‘추기(追記)’를 달았다. “법정(法頂)은 ‘버리고 떠나기’를 권했다. … 나도 이제 늙고 병든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버리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 다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강좌가 민족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관한 일을 시민과 더불어 고민함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구실을 충실히 감당하도록 노력하기를 부탁드리고 싶다”고 적었다.

이 교수가 지난 3월 입원 직전 참석한 '한국사 시민강좌'편 집회의 모습. 왼쪽부터 민현구·이태진·이기백 교수.

‘한국사 시민강좌’는 이 교수가 지난 1987년 대중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자신의 베스트 셀러 ‘한국사신론’의 인세(印稅)를 들여 창간한 반연간지(半年刊誌). 매호 큰 특집을 통해 한국사 연구 성과를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이 교수는 지난 3월 병구(病軀)를 이끌고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특집으로 한 제35집의 편집회의를 주재한 후 바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의 마지막 집필이 된 이 글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추기를 붙였다.

‘한국사 시민강좌’는 민현구(고려대) 유영익(연세대) 이기동(동국대) 이태진(서울대) 교수 등 나머지 편집위원들이 계속 간행한다. 내년 2월 간행되는 제36집의 특집은 ‘국운을 좌우한 외교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