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1월 3일 탄핵위기로 궁지에 몰린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간선거 개표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부인하며 위증을 한 클린턴 때문에 온 나라가 탄핵찬반 논쟁으로 들끓고 있었다. 개표를 지켜보던 클린턴은 환호성을 질렀다. “다마토가 졌다!” “페어클로스도 패배했다!”
유권자들은 클린턴을 탄핵위기로 몰고 간 공화당의 저격수 알폰소 다마토와 로치 페어클로스 상원의원을 버린 것이다. 상원 금융위 의장이었던 다마토는 화이트워터 스캔들에 대한 조사를 끈질기게 벌여 클린턴 부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페어클로스는 전임 부시행정부에서 일했던 케네스 스타를 클린턴의 스캔들을 조사할 특별검사로 기용하도록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은 인물이었다.
18년간 의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다마토는 클린턴의 지원에 힘입은 찰스 슈머에게 자리를 내주고 정계를 떠났다. 페어클로스는 ‘변호사 출신의 젊은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클린턴과 다를 바 없다’고 공격했던 신인 존 에드워즈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중간선거가 있기 두달 전 스타 검사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와 클린턴의 증언장면을 담은 테이프가 공개된 후, 공화당이 운전대를 잡은 ‘탄핵열차’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당시 공화당을 이끌던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은 중간선거에서 클린턴의 성추문과 탄핵문제를 최대한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공화당은 당연히 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고, 공화당 후보들은 지역구에서 경쟁상대보다는 탄핵위기에 처한 대통령과의 대결인 것처럼 유세를 벌였다.
그러나 현실은 깅리치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바람은 거꾸로 불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당은 이 역풍에 하원의석 5개를 날렸다. 깅리치는 중간선거 패배와 당 내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원의장직을 사퇴하고 의원직도 내놓았다. 1994년 선거에서 ‘신(新)보수 혁명’을 주도하며 공화당이 40년 만에 상·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동시에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내 최고 지도자가 정치생명을 잃은 것이다. 탄핵 역풍에 저격수 잃고 지도자도 잃은 공화당은 위기감에 빠졌다.
탄핵 정국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 실시된 중간선거는 사실상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심판이었다. 1998년에서 99년 초까지 정치권에서 탄핵논의가 어떻게 전개되든 미국인들의 대다수는 대통령의 탄핵을 원치 않았다. 클린턴의 잘못에 대해서는 비판했지만, 견책 정도로 끝날 일이지 탄핵까지 할 사유는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클린턴의 업무수행 능력에 대한 지지율은 탄핵정국 속에서도 60%를 상회했다. 지난 40년간 미국 대통령들의 평균 56%를 웃도는 높은 지지율이었다. 클린턴 집권 기간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면서 미국인들은 일 잘하는 대통령이 임기를 마쳐주기를 바랐다.
공화당의 탄핵열차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당시 한 공화당 의원들은 “내 지역구에서는 90% 탄핵찬성 의견만 나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2월 19일 하원은 탄핵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지지도는 오히려 73%로 치솟았다. 사상자는 오히려 공화당쪽에서 나왔다. 깅리치에 이어 하원의장으로 내정됐던 밥 리빙스턴이 혼외정사 스캔들로 사임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20일 후 상원이 탄핵안을 부결시킴으로써 탄핵소동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공화당은 국민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에 귀 기울이지 않은 대가로 치명적인 역풍을 겪고, ‘탄핵될 뻔한 대통령’만 만들어내고 말았다.
(강인선·워싱턴 특파원 insun@chosun.com)